[ 칼럼 ] 그리스도의 몸, 피는 생명의 근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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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그리스도의 몸, 피는 생명의 근원 (3)
  • 합동투데이
  • 승인 2020.01.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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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목사 (주님의 숲 교회, 본지 칼럼니스트)
박재환 목사
박재환 목사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다. 생명을 대표하는 단어다. 그도 그럴것이 생명있는 것은 모두 피를 가졌다. 특히 사람의 피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에 대한 예수의 생명 부여는 당신의 피를 쏟으신 것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성찬의 포도주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피, 곧 ‘생명’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드는 예식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피와 교회의 건강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1. 몸이 하나인 증거들

 

바울의 교회론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몸의 각 조직이나 기관은 당연히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체의 다른 조직이 또다른 조직을 무시하거나 하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상 한 몸을 구성하는 조직이기에 모두가 소중하며 절대적이며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병원에서 죽는 사람을 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생명이 끊어지는 사람은 몸의 모든 조직이 망가져서 죽는 경우가 없다. 몇 가지 혹은 한 가지 질병으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을 본다. 염증이나 파괴된 세포나 경화된 병변이 피를 타고 퍼지고 확장되고 쇼크를 주어 숨이 멎는다. 그러니 몸이 하나임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죽음의 때로 보여진다. 물론 죽기 전이라도 작은 질병을 통해서도 이것은 증명된다. 머리가 아픈데 몸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간이 기능을 못해서 복수가 차는 것을 본다. 몸의 어떤 기관이라도 다른 기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몸은 전체가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가 아무리 건강해도 한 부분에 암이 생기면 그 암이 커지고 확장되면 생명 자체, 몸 전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몸의 모든 부분이 다 죽고 심장만 살거나 위장만 살 수 없고 몸의 다른 부분은 건강한 상태로 간만 죽거나 폐만 죽는 것이 아니다. 몸은 전체로 구성되며 작은 한 부분의 경색으로도 충분히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몸은 사실상 하나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공동체 구호가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이다.

 

2. 혈액순환 - 성령의 코이노니아(KOINONIA) 각주1

 

몸의 각 기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공유하고 힘을 얻고 살아갈까? 그것은 피의 흐름, 즉 혈액순환을 통해서 가능하다. 피의 흐름이 둔해지거나 피의 흐름이 원만하지 못하면 반드시 병에 걸린다. 그리고 그 혈액순환의 장애가 치명적인 위치에서 발생한다면 급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혈액순환은 성령의 ‘코이노니아-’이다. 우리말로는 ‘교통‘, ‘교제’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故대천덕 신부의 언급처럼 ‘할렐루야’처럼 ‘코이노니아’를 원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았을 것 같다. 우리의 표현으로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제, 즉 코이노니아이다. 거룩한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교인들의 성령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전달되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다. 외부로부터 멸망케할 이단사상이나 더러운 세속의 가르침이 차단된다. 사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신선한 산소와 영양분 백혈구와 같은 세균과 싸울 병사들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교회의 가르침이 공예배에서 바르게 설교를 통해 선포되고 이를 묵상하고 나누는 신실한 교인들의 교제가 있다면 교회는 당연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당수의 문제는 혈액순환 장애와 이로 인한 심근경색이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서로 단절된 상태로 각자 예배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로를 향한 교제가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서로 관여할 일도 없고 관여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우리가 학교나 직장, 사교클럽만큼의 교류도 없는, 멀쩡하게 보이나 다 망가져버린 껍데기 같은 교회에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면서 다니고 있다면 베드로에게 건네신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13:8)

 

3.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찾아서

 

교제의 시작과 끝은 복음이어야 한다. 나는 세속적인 지도자가 어린 신앙인들을 양육한답시고 세속의 성공주의, 영업전략, 성형시술, 다단계판매, 교육지상주의, 기독교 문화우상, 지식 우월주의, 자유주의, 이단 사이비 사상, 귀신론, 신비주의 운동, 감정주의 등의 온갖 쓸 데 없는 짓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결국 교회를 파괴하기에 이르게까지하는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계몽이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거나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업의 성공과 덕담을 나누며 용기를 북돋우는 모임도 아니고 기도했더니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간증을 하는 모임도 아니다. 또한 성경을 파헤쳐서 다른 사람들보다 신학적인 우월함을 추구하는 모임도 아니다. 예수가 부활이고 생명임을 증거하고 예수가 구원의 이름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고 나누고 섬기는 삶이 코이노니아이다. 성경공부보다 더 크고 기도회보다 더 뜨겁고 기부금을 모으는 것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 그 안에 있다. 삶 전체가 흐르고 전달되고 나눠지고 보여지기 때문에 코이노니아의 범위는 전인격적이며 삶 자체가 된다.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찾는 것은 목회자에게나 교인들 모두에게 매우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며 광범위한 일이 분명하다. 일 년에 한 두 번의 심방도 거절하는 판국에 코이노니아라니... 하지만 코이노니아보다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없다. 교회의 생명력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데는 코이노니아가 최고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우리 교회에 피는 잘 돌고 있는가?

 

각주1)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는 '공유하다', '남과 함께 나누다', '공통'(共通), '다같이'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요일1:3) ② 인간 서로간의(성도 사이의) 친교(요일1:7) 등이다. 하지만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교제(출19:5-6)나 어떤 특별한 개인과의 교제(출33:9-11)가 나타난다. 이때 희생제사는 그 교제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의 교제로 승화된다. 특히, 사도 바울이 관용어처럼 언급한 '그리스도 안에'(엡1:4)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교제의 경험의 핵심과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기 위하여 부르셨는데(고전1:9), 이 교제는 단순히 개인적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엡4:16). 결국,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들(형제)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한다(고전12장; 요일4:20-21).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가스펠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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