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박사의 신학 논단 ] 고난주간에 던지는 묵상 - 십자가와 악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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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박사의 신학 논단 ] 고난주간에 던지는 묵상 - 십자가와 악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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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0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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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교수 ( 기독연구원 느혜미야 )

십자가와 악의 문제 -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죄와 구원의 표지>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정의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고난과 억울함까지도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라는 점에서, 어떤 경우라도 배제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법률 관념에 기초해 형벌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이해하면서 이 세계의 불의에 대한 항거 표지로도 이해하면서 종국적으로는 역사 안에 실존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김동춘 교수
김동춘 교수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리심으로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그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특별한 구원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죄 사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그런 의미만 있겠습니까? 사죄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신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죄와 구원의 표지>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정의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두 가지 차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근거>일 뿐 아니라, 세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늘상 들어 왔던, 그러니까 주로 교리적으로 이해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고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사죄와 구원의 십자가였다면, 20세기에 와서 현대신학자들은 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죄 없이 죽어 간 사람들의 고통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의로운 자들의 죽음과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옹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애매하게 고통을 겪다가 죽은 이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독일 제3제국 히틀러 나치 시대에 아우슈비츠 독가스실에서 죽어 갔던 유대인들의 죽음이나,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진압군의 총에 죽어 간 이들의 무고한 죽음이나, 세월호에서 이유 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죽어 간 꽃다운 학생들의 죽음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고난과 아무 상관없이 그냥 버려진 채 죽은, 개죽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는 점에서 '배타적인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는 이유 없이, 불의한 자들 손에 죽어 간 이들의 무고를 변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죄 없이 죽어 간 유아들과, 의를 위해 핍박받다가 죽어 간 의로운 이들과, 천재지변과 재난으로 죽어 간 희생자들과, 악한 통치자 손에 피 흘려 죽임당한 사람들, 그리고 이해 불가한 이유로 장애로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 가운데 함께 연대하시고 그들의 고난 가운데서 <함께 연민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포용적인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효과를 미치고, 교회 다니는 우리에게만 특별한 은총이 될 뿐, 그렇지 않은 사람들, 교회 밖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파멸의 의미로만 다가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차별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사하는 은총의 십자가가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놓고 단 한 번도 [나를 위한 '배타적인' 십자가 죽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관용 어린 하나님의 호의이며, 그것이 [우리를 위한 '포용적인'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나를 위한 십자가,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십자가만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은총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는 무한히 너그러우시고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기심과 저주를 조장하는 종교 상징이 되고 말 것입니다.

도리어 십자가는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고난과 억울함까지도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라는 점에서, 어떤 경우라도 배제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포용과 환대의 복음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는 <대속의 십자가>로만 이해되었지만, 20세기에 와서 십자가는 <신정론神正論의 차원>(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왜 악이 일어나며, 그 악으로 인해 왜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의로운 사람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며 이유 없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어떤 위로와 해답을 줄 수 있는가?'를 묻는 그런 차원에서 질문을 더 많이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 세계의 고난당하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눈감지 않고, 함께 고통하며 아파하는 하나님으로 현존하십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세상에서 겪는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 죽음과 깊숙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사람들을 깊이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 연민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에 십자가와 악의 문제를 묵상하면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은 광주 민주화 항쟁입니다. 그러나 광주 항쟁이 이념의 논란 속에 파묻히면서 십자가의 신정론의 의미를 도전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가, 세월호 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문제의식에 심각하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세월호가 반공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그저 침몰한 배 안에서 죄 없는 학생들이 죽어 간 대참사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해에 교회 다니는 많은 젊은이가 '왜 교회 강단에서 세월호 사건을 신앙의 관점에서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가?' 항의하면서, 실망한 채로 교회를 많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대속의 의미로 설교해 왔던 목회자들에게 십자가는 <애매한 고난과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신정론과 연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신학적 난제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죄 사함의 표지로, 구원의 근거만이 아니라 애매하게 고난당하다가 죽어 간 사람들을 위한 신정론의 의미로 이해하는 지평의 전환이 필요하겠습니다.

고난주간 한복판에 있지만,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일조차도 의미 없음으로 느껴지는 이 시점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향해 절규하신 아들의 외침,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 외침을 '코로나 블루' 상황과 연결해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우리의 콧잔등을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종교 감정의 자극제로 소비하려는 습성과 결별하고, 십자가 신앙을 역사 현실과 전 지구적 악의 현실과 결부 짓는 관점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역사 속에 출몰한 악의 현실과 힘들을 향해 외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부르짖음입니다. 아직 당도하지 않았지만 부활의 신앙으로 내다보면서, 골고다 십자가 고난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선취적으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를 내다보게 하는,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굳건한 소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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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예상되는 신학적인 질문을 미리 답변하고 글을 마무리합니다.

질문: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개개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십자가 죽음으로 대신 받으시고, 원죄를 포함한 우리 모든 죄를 속량하셨음을 믿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이 허락되는 듯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위배되는 생각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론을 속죄론으로만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형벌당하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고, 그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구원 관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벌 대속론으로 속죄론을 이해하는 것은 서방 기독교가 이해하던 구속 교리였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기독교 구원 이론은 <형벌 대속에 근거한 속죄 모델>(atonement model)의 구원론이었습니다. 이 구원 이론은 법률적·사법적 모티브에 근거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고, 개별 인간은 하나님께 채무를 변상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형벌을 대신 받아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는 형벌 대속론은 로마적 법-사고에서 싹이 트고, 중세 교회 안셀무스의 만족설에서 정립되어 서방 교회의 속죄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법률 관념에 기초해 형벌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형벌 대속론은 하나님을 자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을 향해 보복심과 노여움을 잔뜩 품고 있는 폭군 이미지로 둔갑시켜 버립니다. 이런 생각은 신적 자기 만족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잔인한 고통을 겪게 하신다는 일종의 새디시트(자학적인) 하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톰 라이트 같은 신학자조차 십자가를 형벌 대속론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매우 협소한 구원관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벌 대속론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더 설득 가능한 십자가 구원 이론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생소한 '도덕 감화설'(십자가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사랑의 감화를 끼친다는 아벨라르 이론)을 포함해서 '역사 안에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구원 이론은 십자가 구원이 단지 개별 인간의 채무 해결을 위한 법률적-형벌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전체 인간을 위한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며 구원의 서사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개별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의 여부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악에 의해 침탈된 죄 많은 '역사' 속에서 거시적으로 진행되며, 그러므로 '십자가는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여 준다는 관점입니다. 이 구원 이론은 이레나에우스에 의해 주도적으로 싹텄다가, 구원을 역사의 지평에서 성찰하게 된 20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숙고되었습니다.

십자가 구원을 형벌 대속적으로만 이해해서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이해하면서 이 세계의 불의에 대한 항거 표지로도 이해하면서 종국적으로는 역사 안에 실존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개별 인간에게 구원의 희망을 안겨 준다는 개인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온갖 악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문제에 대한 해명이라는 점에서 신정론의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구원의 해답만이 아니라 신정론의 해명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으로 제시된 십자가가 예수를 믿는 개별 인간이나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에게만 매우 제한적으로만 유의미할 뿐입니다. 죄 없이 죽어 간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 그러니까 한국적 상황에서 말한다면 4·3 제주의 죽음, 5·18의 죽음, 세월호의 죽음과 같은 억울한 자들의 죽음에 아무런 응답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론적으로 이해된 구속의 십자가는 신정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역사 속에서 분출된 수많은 아픔과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자들에게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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