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로잔 운동 점검(2) : 로잔운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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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로잔 운동 점검(2) : 로잔운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비판적 고찰
  • 문태순 목사(동서역사문화연구원 학술 이사)
  • 승인 2024.03.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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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혼란스러운 관계 정립해야

그리스도는 그 사회와 정치구조를 뜯어 고치려는 대신에 자신이 소금의 맛을 내고 빛과 같이 빛나는 선한 행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늘의 아버지를 증언

전도가 정치사회적 영역에 관여하기 시작하는 한 순수한 복음전파에는 일정부분 해가 될 수밖에 없어

칼빈(John Calvin)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시민국가의 관할권을 구별

전도하는 사람이 어떤 사회나 공동체나 국가에 대해 자신의 이익이나 일부 집단의 이념적 판단에 근거해서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어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단순 병렬적 관계를 넘어서는 신학적 원리 제시해야

로잔 언약은 15개의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언약들 중에서 다섯 번째 언약인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이 언약은 먼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자 사람을 심판하는 분이심을 공언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정의와 화목의 관심을 공유해야 하며 어떠한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남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관심을 나누어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종교나 피부색이나 문화, 계급, 성 혹은 나이 등과 상관없이 타고난 위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엄으로 인해 남자든 여자든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에게도 착취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로잔 운동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분에서 회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들이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서 인간의 위엄이나 남녀의 자유 등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적 정의실현과 사회적 화목을 소홀히 해왔다는 이유에서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민족)들과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 같지 않으며, 사회적 정의와 불의에 대항하는 행위가 곧 전도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정치적 자유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은 전도(evangelism)와 사회정치적 참여(political social involvement)가 그리스도의 의무의 두 영역이라고 단언하려 한다. 그들이 전도와 사회참여의 두 영역을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복종 모두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메시지에는 모든 종류의 소외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판정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하려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악(vile)과 불의(injustice)가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든 그것들에 대하여 비난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로잔운동의 입장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 비판적 검토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될 수 있다. 하나는 성경에 근거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학문인 정치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전도와 관련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대표적인 말씀은 아마도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마태복음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선포한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전도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데 제자는 한자어로는 아우(弟)와 자식(子)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형제 사이에 나이차도 들쭉날쭉하고 또 조혼을 하였기에 형님의 자녀나 그의 아우가 나이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장형이 집안에서 아우와 자기 자식을 함께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확대되어 선생님이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자신의 아우나 자신의 자식과 같이 여기며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의미에서 제자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헬라어에는 “제자가 되게 하라”(μαθητεύσατε, 마쎄튜사테)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그 기본 뜻은 ‘배우다’(μαθητεύω)이다. 그런데 ‘배운다’의 뜻에는 선생으로부터 무언가를 습득하고 익혀서 결국에는 선생이 하는 것과 같이 실천해 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제자가 되게 하라”는 전도자가 누군가를 가르쳐서 선생이 하는 그대로 따라서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배움의 내용은 세례를 베푸는 것과 하나님이 분부한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자가 되게 할 때는 그곳이 어디이든 그것이 어느 때에 이루어지든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며 전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증인’은 헬라어로는 ‘μάρτυς’(마르튀스)다. 그런데 이 증인이 되는 자는 반드시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해야 한다. 그 말의 뜻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에서는 대체로 이를 ‘witness’(목격자)로 번역한다. 하지만 ‘마르튀스’(마르튀래)는 ‘증인’ 이외에 순교자의 의미도 갖고 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하여 전도를 정의한다면 먼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것을 끝까지 증언하는 증인, 죽음도 불사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정치적 책임과 관련한 성경적 근거는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마 5:13)과 “세상의 빛”(마 5:14-16)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도자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자신을 죽여 가며 그 맛을 잃지 않아야 한다. 또한 전도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 자기를 희생하면서 선한 행실로 밝게 빛나야 한다. 전도자가 남에게 빛이 될 만한착한 행실을 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전도자로서 이 말씀대로 행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살았던 사회가 악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정치적으로 권모술수가 난무한 사회 속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사회적 상황과 정치적 구조 속에서도 사회적 정의를 외치고 개혁하는 대신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고통 받는 자들, 어린이들, 과부 등 하층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분이 살던 세상의 악랄함과 불법성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죄없는 그분을 십자가 처형으로 처벌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 사회와 정치구조를 뜯어 고치려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소금의 맛을 내고 빛과 같이 빛나는 선한 행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늘의 아버지를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잔언약이 소외 문제나 억압과 차별의 문제 등에 대해 악으로 규정하고 불의로 단죄하려 드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전도가 정치사회적 영역에 관여하기 시작하는 한 순수한 복음전파에는 일정부분 해가 될 수밖에 없다. 백보를 양보해서 혹시 전도가 사회정치적 모순에 관여하는 초기에는 비교적 복음에 근거하여 순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무엇보다도 국가나 사회의 권력자가 바뀌려 하지 않을 때 순수한 전도자라 하더라도 인간적 감정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ter, 1483-1546)가 처음에는 순수한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철저하게 복음적이지 못하게 되면서 후에는 정치영역과 관련되어 결국 농민전쟁(1524-1525)으로 확대되었던 것은 하나의 예가 된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시민국가의 관할권을 구별하였다. 물론 그가 이 둘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치가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먼저 정부의 목적이 하나님께 드리는 외적인 예배를 지원하고 보호하고,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위치를 변호하며, 우리의 삶을 사람들의 사회에 적응케 하고, 우리를 화목하게 하고, 공공의 화평과 평안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통치 방식은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고(렘 22: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시 82:4, 개정)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시 82:3-4)지는 것이다.

독일 출신의 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 따르면 소명으로 알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정치의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세상을 세워가기 위해 파숫군이 길고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정치에 임해야 한다(『Wissenschaft als Beruf』, 소명으로서의 학문)고 주장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회가 한 순간에 정의와 공평과 자유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명으로 알고 일평생을 새벽과 같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래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전도하는 사람이 어떤 사회나 공동체나 국가에 대해 자신이나 일부 집단의 판단에 근거해서 어느 한 나라나 민족에 대해 차별이 있고 억압이 있다거나 불의하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대단히 위험한 판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전도자가 자신이 전하러 간 사회에 대해 악하다거나 불의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정의를 세우고 사회적 불의를 타파하는 것인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본래 뜻에도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로잔 언약의 다섯 번째 선언인 정치사회적 책임의 조항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도자는 참 소금의 맛과 참 빛의 순결함과 선함을 몸소 실천해야 함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도자 자신의 결단적 의지와 행실을 통해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전도자 자신이 속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 나라에서 또는 그 장소에서 먼저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 속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존재로 선행 행실의 빛남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는 것이 우선이다. 로잔언약 안에 이러한 내용이 고려되어 새로운 언약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태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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