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보] 전남노회 분립,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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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 전남노회 분립, 무슨 일이 있었나?
  • 김성윤기자
  • 승인 2023.09.0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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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 갈등문제, 총회임원회 ‘수습처리위원회’ 구성 가능... 규칙 24조 3항에 규정

기존 노회 중심 교회들 리더십과 정치력 부족, 중간지대 교회들 ‘노회정상화모임’ 활동

양측 중 한 측 선택하며 분립 현실화... , 106년 노회 역사에 오점 남겨

총회 임원회도 표결까지 하며 전격 결정...제108회 총회 벽두에 이슈될 듯
(가칭)광주전남노회원들이 힘찬 출발을 다지고 있다.

전남노회가 전남노회와 (가칭)광주전남노회로 분립됐다. 지난 8일 소위 ‘이탈측’에서 이날 열린 총회임원회의 결정을 근거로 분립예배를 드리면서 법적절차가 마무리 됐다. 다음주 열리는 제108회 총회에서 임원회의 보고를 받으면 분립은 마무리된다. 총회 임원회는 8일 전남노회 분리에 대한 결정을 표결로 처리했다.

총회규칙 제24조 3항은 “분쟁이 발생한 노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총회의 결의로 수습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케 할 수 있으며, 총회 파회 후에는 총회 임원회가 수습처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총회 임원회에서 수습처리의 주체가 되어 분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행세칙에서 수습처리위원회를 분립위원회로 전환해 분립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고광석목사가 분립위원장이 되어 분립예배를 이끌어 (가칭)광주전남노회의 신설분립을 공포했다.

이제 남은 절차는 제108회 총회가 임원회의 보고를 받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총회 현장에서 총대를 호명할 때 이 문제가 보고될 것이며, 총회는 이부분에 대해 결정할 것이다. 표결까지 갈 수도 있다. 총회에서 총대들이 받아들이면 분립은 마무리되고 총대들이 인정될 것이지만, 총대들이 거부하면, 본회에서 분립위원회를 조직해 분립작업에 나서게 될 것이다.

106년 자랑스런 전남노회의 역사

우리 나라에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와 아펜셀러(H.G. Appenzeller) 및 의사 스크랜톤(W.B. Scranton)가 1885년 4월 들어온 이래, 선교사들의 활동이 계속되는 중 각 교파와 선교회의 마찰을 피하고 선교활동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예양협정(禮讓協定)을 맺어 미국 남장로회가 호남지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1891년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에 영향을 받아 최의덕(L.B. Tate) 이눌서(W.D. Reynolds), 전위렴(W.M. Junckin)과 그의 부인들 3인, 데이비스 양이 호남선교를 담당하였다. 1893년 전주에 첫 선교의 깃발이 세워지고 1893년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으나 실패하고, 1898년 목포 양동교회, 99년 나주군 광주군 영광군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900년대 초기 암울해지기 시작한 일본의 지배 아래서도 1903년 나주광암교회, 1904년 광주 양림리 교회, 옥과교회에 세워지면서 광주 선교부가 정착하게 되었다. 1905년 나주에 기도처도 세워지는 등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907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1년에는 전라노회가 결성되었다. 이어 1917년 9월 17일 유서백 목사를 임시의장으로 하여 목포 양동교회에서 목사 10인, 장로 13인이 참석하여 전남노회를 처음 조직하게 되었다. 당시 전남노회는 제주도를 포함하여 60여 곳의 교회가 세워지는 큰 발전이 계속되었다.1922년에는 순천노회가, 1930년에는 제주노회가 분립하여 독립하였으며, 전국에서 처음으로 평양노회와 함께 재단법인을 설치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교회들은 11월 광주 금정교회에서 35회 노회를 모이고 재건했으며 6.25 한국전쟁 중인 43회 노회에서는 4지역으로 활동하여 큰 성장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교회가 불타고 160여 인이 순교하였다. (1959년 통합측과 분립이전의 역사)

전남노회는 이처럼 1911년 전라노회에 이어 1917년 설립 이후 전남지역 노회의 모체가 되었고 제주노회의 모노회까지 된 호남 지역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비껴있는 노회이다. 현재 광주전남지역에는 광주노회, 광주동부노회, 광주제일노회, 빛고을노회, 동광주노회, 서광주노회, 남광주노회, 목포노회, 목포서노회, 동목포노회, 목포제일노회, 전남노회, 전남제일노회, 호남노회, 무안노회, 여수노회 등이 있다. 올해 광주동부노회와 서광주노회는 광서노회로 합병했다가 다시 분립을 선언하는 등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광주전남지역노회의 원종장 역할을 한 것이 전남노회의 역사이다.

리더십 부재가 뼈저린 결과 만들어

하지만, 전남노회 분규와 분립의 과정을 보면 리더십 부재가 원인이라는 평가가 더 뼈저리게 다가온다. 전남노회의 분규는 2년 쯤 전으로 올라간다. 물론 그 전에도 개별적 갈등들이 있었지만, 세력화 되면서 분립 수준에 이를 정도의 갈등은 아니었다.

갈등의 핵심 내용은 총대 출마와 선출을 두고 벌어진 것이었다. 지난해 107회 선관위에서 노경수목사가 후보자격을 놓고 수차례 부적합과 적합을 두고 자격이 오르내린 것도 이런 노회 갈등이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분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인 일이며, 불필요하다. 전남노회는 지난 수년동안의 과정을 통해 여러차례 노회 재판국설치, 법원의 소송과 취하, 합의와 파기 등이 반복되며 불신과 반목을 키웠다. 고퇴 탈취와 노회 직인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선관위의 총대 숫자문제에 대한 논란도 일어났다. 이 모두 총대 선출을 두고 일어난 갈등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중간지대의 교회목회자들은 ‘노회정상화를 위한 모임(대표 임춘수목사)’을 만들고 양측의 타협을 요구했다. 이 모임은 지난 2년 동안 활동하며 노회 통합 노력의 축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존 노회 주도 측에서는 다른 측이 21당회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고 타협을 거부했다.

하지만 노회정상화 모임이 한쪽을 선택하며 분립은 현실화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관철되는 조건을 제시하고 21당회를 넘긴 후 전남노회는 결국 분립됐다. 전남노회의 분립은 중간지대 교회들의 결단에 의해 현실화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 노회 측의 리더십 부족이 드러난다. 광주동명교회(이상복목사)와 광주중흥교회(김성원목사)등 노회 주축 교회들의 비타협적 태도가 분립에 이르게 되는 결과를 제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간지대의 노회정상화모임까지 포용하지 못하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통큰 리더십과 정치가 없다보니 결과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지막까지 양측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력과 리더십의 부족은 결국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노회 분립의 현실인 것이다. 전남노회측 인사는 본지의 수차례 전화에도 응답하지 않고 있다. 

총회임원회 보고, 총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총회임원회는 이런 사정을 살펴 결단을 내렸다. 표결을 실시한 끝에 분립결정을 내렸다. 표결 숫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제 공은 총대들에게 넘어갔다. 총대들이 회의 개회를 위해 총대 호명 할 때 전남노회 총대문제에 대한 임원회의 보고를 받고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 총대들은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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