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51) - 다섯 가지 성례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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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51) - 다섯 가지 성례에 대한 비판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10.1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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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교황주의자들은 미사에서 그치지 않고 성례를 새로이 만들어내어서 그들의 불경한 행위를 확장하였다. 그들이 (7가지) 성례를 성령의 그릇들, 의를 부여하는 도구들, 은혜를 얻는 원인들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게 하는 형상이라고 주절대고 있기 때문이다(제4권 19장 1절). 그러나 성례가 성례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에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성례에는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대표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다섯 가지 성례가 모두 그러하다.

첫째로, 견진성사(堅振聖事, Confirmation)는 ‘도유’(塗油, 기름부음)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는 너를 거룩한 십자가의 표징으로써 인치고 구원의 기름으로써 견진(堅振, ‘굳세게 떨쳐 일어남’)하노라”는 말로 행해진다(제4권 19장 5절). 견진성사에서 핵심은 도유와 그것을 주재하는 주교다.

교황주의자들은 도유를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제4권 19장 7절 적용). 그들이 기름을 바르면서 주장하는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성령이 세례에 있어서는 결백함을, 견진성사에 있어서는 은혜의 증가를 위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는 세례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명으로 거듭나고, 견진성사에 있어서는 싸움을 준비하게 한다는 것이다(제4권 19장 8절 적용). 거짓이다. 성경이 “세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은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롬 6:4-5)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육체를 죽이시고 우리 영을 살리실 수 있고 하였다. 그들(주교 또는 사제)이 붓는 기름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제4권 19장 5절).

도유를 하는 자는 최고 사제인 주교다. 도유는 사람의 이마에 하고 세례는 사람의 머리에 한다. 웃기는 것은 이마가 더 중요한 곳이기에 도유가 세례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욱 한심하게도 도유하는 주교의 손이 중요하기에 은혜의 양이 주교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떠드는 것이다(제4권 19장 10절). 그들은 주교(후에 사제들 포함)를 죄를 방면하는 자로 만들었다. 도대체 주교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 주교들만이 유일한 사도들일 수 있는가. 피의 성례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는데 왜 주교들은 만지고 평신도들은 만지면 안 되는가(제4권 19장 11절).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지만 바울에게 성령 충만의 기름부음을 주었다(행 9:17-18).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주교는 결코 사도들이 아니다. 도유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견진성사는 하늘에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왔다(4제권 19장 5절 적용). 따라서 “주교의 견진성사로서 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절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제4권 19장 9절)는 그들의 불경한 주장은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져야 한다. 믿음에 입문하고 믿음 위에 서서 당당히 나아가는 것은 세례와 성령의 역사로 완전하며 충분하다.

둘째로,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 or Penitence)는 그 출현이 고대교회의 회개의 질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고대 교회에서 공적으로 회개할 때 지켜지던 질서가 있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자신들에게 지어져 있는 보속을 완수한 사람들은 공식적인 안수를 통해서 (그 안수하는 사람들과) 서로 화해되었다는 것이다. 즉, 안수는 씻음의 징표로써 죄인(자신)이 은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게 하는 것이었고, 교회는 그를 은혜 중에 선하게 받아들이는 권고로서의 질서와 같았던 것이다(제4권 19장 14절 적용).

교황주의자들은 여기에 사람들에게 무게감을 더하고 더 높이 평가하도록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끼어 넣었다. 이 공적 회개 행위는 시간이 가면서 사적인 회개에도 적용되어 갔으며 마침내 그들은 외적인 회개가 성례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제4권 19장 15절 적용). 외적 회개가 내적 회개의 징표이자 마음의 회개의 증표라고 우긴 것이다. 하지만 안수는 사람이 제정한 의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고해성사에는 하나님의 그 어떤 특별한 말씀이 담겨 있지 않다(제4권 19장 17절). 거기에는 그 본체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헛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상황을 정확히 통찰하고 비판하였다. “가시적인 성례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적인 성화가 없는 가시적인 성례가 있다”(제4권 17장 16절). 그는 안수를 기도와 같이 여겼다. “성령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사랑, 그것이 없이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거룩한 것도 구원을 위하여 무가치하기 때문에, 이단들을 바로 잡기 위해 안수하는 것이다.”(제4권 19장 12절). 그는 안수가 육신을 지닌 자들을 위해 보여주어서 죄의 속죄에 담겨 있는 뜻을 깨닫게 하는 성질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육신의 사람들은 성례의 사다리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이해함으로써만 지각될 수 있는 일들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육신의 형식도 영적 열매를 드러내지 못하는 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회개가 외적 형식의 회개가 아니라 내적 곧 마음의 회개이며 외적 형식의 몸이 아니라 내적인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 열매가 없는 회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이유에서 고해성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셋째로, 종부성사(종부성사, Extreme unction)는 주교에 의해서 거룩해진 기름과 그의 말과 곁들여서 사제에 의해서 임종의 때에 행해진다(제4권 19장 18절). 이것을 행하는 이유는 죄사함과 질병의 치유,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 제도의 기원을 야보고에게서 찾았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그들은 특히 죽어가는 자들이나 병든 자들에 대하여 도유가 효험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야고보에 의해서 명령된 것이기에 자신들끼리 효험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제4권 19장 19절). 또한 성경이 기름을 ‘성령의 기름’으로 호칭하기도 하기에 그들은 도유를 성령의 능력이라고 포장해 내었다(제4권 19장 20절).

교황주의자들이 도유의 기름을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교에 의해서 많은 호흡으로 데워지고 주문으로 중얼거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안하라 거룩한 기름이여”(3번) “평안하라 거룩한 성유여”(3번) “평안하라 거룩한 향유여”(3번). 이렇게 아홉 번 무릎을 꿇고 절한 기름이기에 거룩하다는 말이다(제4권 19장 21절).

칼뱅은 그들의 말에 대하여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기름을 치유의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징표로 여긴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야고보의 기름은 그냥 보통의 기름일 뿐이다. 야고보가 장로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한 것은 신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가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치료자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를 통해서 자기의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며, 그들의 병약한 부분들을 필요할 때마다 고치시고 계신다(제4권 19장 19절). 그러니 달리 무슨 기름부음이 더 필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넷째로, 신품성사(神品聖事, the sacrament of orders)는 성령의 7가지 서로 다른 은혜에 상응하여 일곱 신품으로 이루어진다(제4권 19장 22절). 수문품(守門品, door-keeper), 강경품(講經品, readers), 구마품(驅魔品, exorcists), 시종품(侍從品, acolytes), 차부제품(次副祭品, sub-deacons), 부제품(副祭品, deacons), 사제품(司祭品, priests)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교황주의자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오해한 데서 왔다. 이사야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라고 선포하였다. 누가 보더라도 이 선포로부터 일곱 신품이 나올 여지는 전혀 없다. 또한 성령은 생물의 영(겔 1:20), 성결의 영(롬 1:4), 양자의 영(롬 8:15)으로도 불린다. 교황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신품종사에 대한 의견이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9가지 신품을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삭발례를 넣기도 한다.

신품성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방한 것이었다. 수문품은 그리스도가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심”(요 2:15, 마 21:12)에서 찾았다. 강경품은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었을 때의 그리스도를 모방하였다. 구마품은 말 더듬는 사람을 다시 듣고 말하게 했을 때를 모방한 것이었고, 시종품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요 8:12)를, 차부제품은 천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었을 때를, 부제품은 성찬에서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를, 그리고 사제품은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실 때를 각각 모방한 것이었다(제4권 19장 24절 적용).

성례의 의식들은 본체 자체와 최고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성령을 받으라”(요 20:22)하시면서 숨을 내쉬었고,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시고 그렇게 하셨으며, “일어나 걸어가라”(마 9:5, 요 5:28)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 다양한 표징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직접 보이셨다(제4권 19장 29절).

하지만 칼뱅은 교황주의자들이 하급사제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조작으로 보았다. 그는 만약에 사제들이 자기들의 강경사들, 성가를 부르는 자들, 문지기들, 시종들을 세우면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구마사와 관련해서는 그들 자신이 대부분 악한 영에 끌려 다니기에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보았다(제4권 19장 24절). 더욱이 그들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자장직과 관련하여 에봇, 속옷, 관, 기름불사름, 숫양을 죽이는 것 등 무수한 규례에 관한 명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왜 단지 썩은 기름 붓는 것만을 실행하는 지(제4권 19장 31절)를 칼뱅은 의심하였다. 단언컨대 기름보다는 피가 뿌려져야 한다.

삭발례(tonsure)의 경우는 더 가관이다. 그것이 사제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기에 정수리를 면도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라는 말씀이다. 머리끝이 발가벗겨지는 것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18) 하나님의 영광을 관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포장한다. 당시 삭발례는 장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성직자가 물들지 않기 위해 한 것이라는 것은 맞다(제4권 19장 27절). 그러나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은 성화가 아니라 형제들의 연약함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맞추려 한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이를 ‘사랑의 서원’라 불렀다(제4권 19장 26절). 따라서 사제들이 머리카락을 조금 깎고서는 현세적 재산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한다고 허풍을 떨거나, 귀와 눈의 정욕을 죽였다고 자랑하려 드는 것은 지극히 가소로운 일이다.

혼인성사(婚姻聖事, the sacrament of Marriage)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맞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성례의 표징이 없다(제4권 19장 34절). 교황주의자들이 이 성례에 대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바울 사도의 증언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28-32).

그들은 이 말씀으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왜곡했다. 첫째로 이 말씀은 남자들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의 모범으로써 그리스도를 제시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곧 살과 뼈의 지체’로서 그와 ’한 육체‘임을 증명하게 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제4권 19장 35절). 둘째로 그들은 라틴어(Vulgata) 번역자가 바울의 ‘뮈스태리온’(μυστήριον)을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한 것을 오해하였다(4권제 19장 36절). 이 오해에서 출발하여 결혼을 성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사제들이 결혼을 성사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결혼은 불결하고, 오염적이며, 육체적 찌꺼기라고까지 폄훼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혼인성사의 비합리성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겠답시고 자신들의 비혼이 하나님과 영혼의 성사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사(남편과 아내)라는 교묘한 계책까지 고안해 내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결혼이 성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부모의 동의가 없이 자발적으로 맺은 연소자들의 결혼은 그대로 확고하며 유효하다”라는 억지 논리까지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간음한 아내를 배척한 남자는 다른 여자를 들일 수 없다”거나 “영적인 혈육들은 결혼으로써 결합될 수 없다”, 또는 “칠순절로부터 부활 대축일 8일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 3주 동안, 그리스도의 내림으로부터 공현(公現) 대축일까지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 등의 말이 되지 않는 불법적 정책들을 궁여지책으로 고안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제4권 19장 37절 적용).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 세례는 교회에 들어감과 믿음의 입문이고, 성찬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신자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영적으로 먹이는 계속적인 양식이다(제4권 18장 19절). 세례는 하나이며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의 세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희생제물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단번에 사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찬은 반복된다. 신자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먹여주심을 깨닫고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외에 다른 성례는 없다. 만일에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성례가 되어야 한다면 너무 많은 성례가 세상에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 안에도 성례 아닌 성례가 많이 있는 듯하다. 지킬 만하면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않아도 될 법한 상당히 많은 규칙들이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교회 안의 각종 모임에서나 개별 가정 안에도 성례 아닌 것들이 성례처럼 지켜지고 있다. 실제로 신자들이 살아가면서 삼아야 할 규칙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속 부어주시는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교회 안의 모든 규칙이 그러해야 하며 신자 개개인의 규칙이 모두 그러해야 한다. 그 이외의 일체의 규칙들로부터는 신자는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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