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대한의 수많은 칼뱅의 출현을 기대합니다 -기독교강요 둘러보기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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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대한의 수많은 칼뱅의 출현을 기대합니다 -기독교강요 둘러보기를 마치며-
  • 문노사목사
  • 승인 2023.11.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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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저는 2020년 8월의 어느 날부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3년을 훌쩍 넘기는 동안 거의 매일 칼뱅을 만나왔다고 자부합니다. 칼뱅이 저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사코 은혜를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아버지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모든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지니시고 우주와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고백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권세와 능력과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칼뱅에 주신 대표적인 은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공공의 복리를 진척시키고자 하는 열의를 가득 채워주신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저는 배우는 만큼 쓰고 또 쓰는 만큼 배우는 사람 중의 하나”(『기독교강요』 라틴어판 서문-1559년 8월 23일-)라는 고백 그 자체입니다. 이 은혜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신학에 입문하는 자들에게 준비해서 가르치려는 목적을 지닐 수 있었고, 동시에 그들이 말씀에 쉽게 접근하고 넘어짐이 없이 말씀 안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따라 칼뱅은 당시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인 프란시스 1세 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강요』를 쓴 이유가 종교적(경건)이고자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참 거룩함의 기초 사항들을 전달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프란시스 1세 왕이 로마교회와 로마교회황제의 거짓교리와 위엄에 눌려 있는 것을 고발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왕의 주변에 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왕이 통치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발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왕의 주위의 악한 사람들에게는 교훈이었고, 칼뱅과 그의 믿음을 따르는 신자들의 올바른 신앙의 제시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칼뱅과 그와 동일한 신앙을 지키는 신자들은 프란시스 1세에게 자신들은 왕(의 판결)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며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고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한 가지는 자신들이 살거나 죽거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칼뱅에게 프란시스 1세 왕은 어떤 인물로 비쳐졌을까요? 저는 프란시스 1세가 프랑스 안에 있는 올바른 신자들을 박해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비쳐졌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프란시스 1세는 명백히 로마교황청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에게만 헌사의 형식으로 충고한 것은 칼뱅이 개인적으로 그의 회개와 깨우침을 기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칼뱅이 프랑스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민족을 대표하는 왕과 자신의 민족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도 생각됩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왜 『기독교강요』를 읽어야 할까요? 하나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공공의 복리를 진척시키고자 하는 열의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배우고 쓰고, 쓰고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저술에 착수하게 된 이유도, 감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공공복리의 증진이라고까지는 못해도, 저 나름의 우리 민족을 향한 복음의 선포와 이 복음이 주는 기쁨과 평안함과 소망을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배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배운 만큼 쓰려고 합니다. 본서의 저술이 끝나면 그것을 위해 쓴 그 만큼은 더 배울 것입니다.

이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대한의 신자들이 『기독교강요』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강요』가 우리의 신앙과 교리를 바르게 세워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바른 신앙과 바른 교리가 세워지면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늘 되새겨보면서 사악한 교리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분별하게 해 줍니다. 예컨대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기도가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체험이 최소한 한 번쯤은 있어야 합니다. 이 조차도 아니면 기도를 부탁하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겠다는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기도의 체험도 없고, 아무런 결단도 없이 마음에 없는 기도를 부탁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신앙이요 엉터리 교리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른 신앙과 바른 교리 위에 서 있다면 신자(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서 세상을 재단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의 파고가 우리 신자들을 거세게 억눌러 옵니다. 신자들이 세상의 풍속과 화려함과 기세에 짓눌려 믿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점검할 수 있고 세상을 재단할 수 있는 바른 신앙과 바른 교리를 소유할 때 신자는 세상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됩니다. 신자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게 할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세상의 겁박과 위협, 유혹과 조롱, 화려함과 허황됨 등을 신자는 능멸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칼뱅의 신학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삶은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의 신학사상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의 진리성, 사람의 완전한 타락, 믿음으로 인한 칭의, 영원한 선택과 유기(예정론), 최후의 부활, 교회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과 교통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의 신앙의 요체들을 각자의 사명에 따라 각각 자신에게 필요한 신학사상을 요소요소에 적용되도록 습득해야 합니다. 이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당당하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삶의 모범을 본받아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의 저주와 사망으로부터는 부활하여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대한의 신자들이여! 이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그 한 날(오늘)에 도전합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늘 살아있게 하는 일에 도전합시다. 신자들 각자가 살아있어야만 가족을 살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살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학교와 사회와 국가를 생기 있게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의 희생제물로 바치셨듯이 그렇게 우리를 희생제물로 만들면 됩니다. 배우고 또 배우고, 참고 또 참고, 쓰고 또 쓰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죽고 또 죽고, 소망을 바라고 또 바라고, 나의 아픔과 우리의 아픔과 이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고 또 함께 합시다.

우리 대한의 신자들이 이 삶을 끊이지 않고 이어갈 때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에게서 칼뱅을 능가하는 신앙인과 신학자들이 줄지어 출현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현 시대의 혼돈과 방황과 좌절과 절망을 그들의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의 후대 신자들에게는 꿈과 소망과 기쁨과 알찬 열매로 가득 찬 믿음을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을 지닌 우리의 젊은 후배 신앙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기대합니다.

 

노사(老史, 낡은 이야기꾼) 문태순 목사 쓰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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