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8) -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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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8) -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 의미(1)
  • 문노사목사
  • 승인 2023.09.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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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그리스도의 성찬은 “떡과 잔의 표징들로써 자기 자신을 구원의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적인 잔치”다(4권 17장 1절).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생명을 살리는 떡임을 증명하시며, 우리 영혼은 그 떡으로부터 참되고 복된 불멸성을 얻게 된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이 비밀을 아는 지식과 이에 대한 엄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탄은 이 보화를 교회로부터 빼앗기 위해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왔고,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성찬의 거룩한 양식의 맛을 멀어지게 하려고 분쟁과 싸움을 조장해 왔기에 이를 물리치기 위해 성찬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교회의 연합체에 접붙이시고, 자녀 삼으신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부여해 주신 생명 가운데 살아가도록 계속 지시키고 보존해 가시며 양식을 공급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하여 아버지로서의 직분을 다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시다(4권 1장 1절).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그와 교통하게 하여 힘을 얻게 하시며 마침내는 하늘의 불멸성을 얻게 하신다. 그 얻음이 곧 그리스도와 경건한 자들의 비밀스런 연합이다. 사람들은 이 연합을 이해할 수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서 표징을 통하여 그 비밀의 모양과 (형)상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이 성찬과 성찬 때의 떡과 포도즙이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것들이 몸의 생명을 지키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증표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마 26:26; 막 14:22; 눅 22;19; 고전 11:14)라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심을 분명히 한다.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22:20; 고전 11:25)라는 말씀 역시 떡을 먹음과 같이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 죄를 속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 이 성찬(례)이 결국 경건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루게 하여 그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의 영생이 우리의 것이다. 그의 천국이 우리의 것이고, 그의 정죄 받지 않으심이 우리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의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신 것이다(4권 17장 2절 적용).

성도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시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지시듯이 확신해야 한다(4권 17장 3절). “받아서 먹고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라는 말씀은 성찬을 통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실제화해 준다. 그의 몸과 그의 피가 우리를 영생하도록 하는 실상이다. 진실로 성찬의 의미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라는 말씀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라는 말씀 안에 구체적이고도 실증적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성도는 성찬에서 떡을 받을 때 그 떡이 그리스도의 몸의 증표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고 살리는 유일한 양식으로 마음속에 받아야 하며, 포도주잔을 받을 때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증표로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고, 새롭게 하고, 견고하게 하고, 즐겁게 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4권 17장 3절 적용). 그럴 때 신자에게 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이 이루어진다.

한편 떡과 포도주의 징표를 통해 그의 몸과 살을 먹고 마심은 반드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4권 17장 4절 적용). 성찬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써 죽음을 삼키시고 파멸하셨음을 반드시 기억하게 하며, 자기 부활 가운데서 우리의 썩은 육체를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일으켜 세우신 것을 반드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의 일체의 부요함의 은총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성찬은 이를 가시화하여 더욱 분명하게 하였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4권 17장 5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심이 가시적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효과와 열매가 성찬을 통하여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찬에서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다.’ 포도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신다.’ 반드시 먹고 마셔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표징들을 가볍게 여겨서 이 표징들과 어떤 형식으로든 부착되어 있는 비밀들로부터 갈라놓지 않기 위해서다. 또 다른 하나는 표징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착하여서 그리스도의 은밀한 비밀들을 모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4권 17장 5절 적용).

칼뱅은 이에 대해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을 뒤따라서 ‘먹고 마시는 일’이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믿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살을 먹게 된다.”(4권 17장 5절)는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저서 『기독교교리론』(De doctrina Christiana) 제3권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요 6:53)라는 말씀을 일종의 형상으로서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는 데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4권 17장 6절). 칼뱅은 또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3천명이 세례를 받았을 때 3천명의 무리가 베드로의 설교 중에 믿음이 들어간 것으로 이해하였다. 말하자면 마치 몸이 음식을 통하여 소생하게 되듯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육체와 교제함(세례와 성찬)으로써 소생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주님의 잔을 “피로 세우는”(눅 22:20) 언약이라 부를 때 믿음을 확정하도록 작용하는 약속이 표현되어 있다는 입장이었다(4권 17장 6절 적용).

성찬의 의미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의 선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원천이시자 기원이시며,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육체를 취하신 이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명이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요일 1:2).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충만함이 들어 있다는 말씀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주변에서 죽음만을 만나고 죽음만이 눈앞에서 떠돌아다닌다면 진실로 생명의 말씀을 믿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찬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시며 그에게 참여하고 있음을 가시화하며 실증해 주는 것이다. 성찬이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교통됨을 우리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성찬이야말로 그의 살이 참된 양식으로, 그의 피가 참된 음료(요 6:55)로 주어지기에 우리가 이 양식들로부터 공급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을 실체화하는 것이다(4권 17장 8절 적용).

물론 그리스도의 살 그 자체에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살 역시 멸성(滅性)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자들에게 지금 불멸성이 부여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그 자체로는 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인 이유는 생명의 충만함이 그 속에 스며들어 있어서 우리에게 옮겨지기 때문이다(4권 17장 9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생명의 충만함이 거하기에 그의 살과 피와 교통하는 자가 또한 생명에 참여하는 열매를 얻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의 ‘충만함’(엡 1:23)이라 불렀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엡 4:15)이시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다(고전 6:15). 그리고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한다(엡 4:16).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의 뼈와 그의 살로부터 나온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30)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살과 피로써의 교제 나눔이 너무도 위대하였기에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2)라고 감격할 수 있었다.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은밀하시고 무한하신 능력의 역사 때문이다. 성령은 얼마든지 공간상 떨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4권 17장 10절 적용). 사람이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믿음으로 품어야 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을 주시고 제시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이 큰 선하심을 마음의 참된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는 자는 누구든지 이 유익을 누릴 수 있다. 바울 사도의 감격해 함이 이에 대한 증거다.

성찬의 질료, 곧 성찬의 본체는 그리스도시다. 그의 육신을 입으심, 죽으심, 부활하심 등등이 질료이자 본체이자 실체다. 성찬의 능력 내지 효력은 구속, 의, 거룩함, 영생, 그리고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일체의 은총들로 발휘된다(4권 17장 11절 적용). 다만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이 우리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우리의 지성이나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 성찬의 물질적인 표징들(떡과 포도주)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서 우리가 받아들일 만하도록 본체들을 표상하는 것이 된다. 우리 신자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육신을 입으심, 죽으심, 부활 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징으로 주셨다는 말이다. 이 물질적 표징들 또한 영적인 실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영생이 우리의 영생이 되고, 그리스도의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형상화하면서 눈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성찬의 의미가 지금까지 논의된 바대로 표징에 담겨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일체의 약속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근거할 때 로마교황청이 성찬 시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역적으로 현존하고, 마치 우리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히고, 입으로 삼키듯이 한다고 주장한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의 항구적인 질서를 따르기에 유한하다. 그의 몸은 심판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에 제한되어 계신다. 그래서 성찬 시에 나누어지는 떡으로 오실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기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몸과 영과 혼에 있어서 자기와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4권 17장 12절 적용).

스콜라주의자들(로마교황청)은 떡의 ‘외양’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거짓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떡을 축성할 때 그 떡 안에 그리스도가 제한적으로 계신다는 헛소리를 하였다. 그 논리가 그들 자신들이 보기에도 우스워보였던 것이다. 이에 논리를 좀 변형시켜서 그들이 축성할 때 그리스도가 떡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떡의 외양, 그러니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떡의) ‘흼’(whiteness)(흰색)으로 변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악착같이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의 현전에 매달리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래서 롬바르두스 같은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로는 보이는 것이나 축성 이후에는 떡의 외양 아래에 숨어 있고 덮여 있다”(4권 17장 13절)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역적으로 현존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기 위해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조작해 내었다. ‘화체’는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이 논리에 맞추기 위해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그 자체로부터 고유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형상 아래에 감추기 위하여 실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4권 17장 14절). 이 주장으로 그들은 축성을 할 때 은밀하게 변화가 일어나서 축성 후의 떡과 잔은 축성 이전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포장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소위 신자의 변화가 세례에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변화를 착각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왜곡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성찬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체설을 혹독하게 평가하여 말하면 교황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지상에 머물게 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접근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4권 17장 15절 적용). 그렇게 할 때 그들의 지상에서의 권위가 세워지고 재산도 더 증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다른 떡이나 포도주와 다른 것은 그것이 변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징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변화의 의미는 ‘광야의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출 17:16)과 같이 지상적 요소들이 영적인 용법에 사용될 때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증이라는 한에서만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4권 17장 15절).

그리스도는 하늘이든 땅이든 원하시는 곳에서 자기 백성을 자기의 몸으로 먹이시고 자기의 영의 능력으로서 그들이 자기와 교제하는데 젖어들게 하신다. 이 방식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 가운데서 우리에게 제시될 뿐이다(4권 17장 18절).

그러므로 성찬과 관련하여 신자들이 고백할 것은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어진, 혹은 깨뜨린 내 몸이니라”(마 26:26, 막 14:22, 고전 11:24),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새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 22:20, 고전 11:25)등의 말씀으로 충분하다.

대한의 참 신자들이여. 이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이루고 교회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는 데 헌신하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일체의 언약과 약속을 상속하는 자들이 되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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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2023-09-12 18:04:27
좋은 말씀 항상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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