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6) -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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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6) - 세례
  • 문노사목사
  • 승인 2023.08.2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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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대표적인 특징은 씻어냄의 증표이자 증거다. 세례는 우리가 교회와 교제하는 것을 허용 받는 입문의 증표이자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입문의 증표다(4권 15장 1절). 그리고 증표로서의 세례는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믿음에 기여한다. 하나는 우리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확신하게 한다. 세례는 우리의 죄가 다 소멸되었고 덮어졌으며 지워졌음을 인증하는 임명장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종교를 드러내는 배지(증표)이자 표시로써 기여한다. 또 다른 하나는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이다.

세례가 우리에게 물을 통하여 형상화되는 것은 그것이 깨끗하게 함, 씻음 등과 유사해서다(4권 15장 2절). 그러나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되고 씻음을 받는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해서다. 베드로가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믿음으로부터 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벧전 3:21)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바울이 교회를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3:26)라고 한 것도 세례의 상징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 번 받은 세례의 표는 어느 한 순간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계속된다(4권 15장 3절). 사람이 어느 때에 세례를 받든지 간에 단번에, 전체 삶 동안, 씻음을 받고 정결하게 된다. 한때 세례는 과거의 죄만을 사하기에 그 후의 생에서 저지른 죄는 다른 형태의 성례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망상이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죽음 직전에 세례를 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세례는 지나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후의 죄들로 인하여 폐지되지 않는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순수함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례를 베풂으로써 죄인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표징과 증언이다. 어쨌든 우리의 죄의 방면은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신자가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죄를 범하게 되면 오직 죄사함의 증표인 세례를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신자는 마땅히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던 세례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중생을, 죄사함은 씻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고해성사와 같은 제도를 형식화하고 교회가 지닌 열쇠의 은총, 곧 교회(신부)가 죄를 사하는 것은 말씀과 세례에 대한 모독이다.

세례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죽임과 살림의 표이기도 하다(4권 15장 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우리로……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올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들의 육체(육의 생각들)가 죽는 것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성령의 살리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과를 의식하게 된다. 신자는 마땅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바울은 이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딛 3:5)이라 하였다. 세례는 죄에 대한 값없는 은총과 의의 전가가 먼저 약속된 후에 우리를 갱신해서 새로운 삶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뒤따르는 것을 우리에게 실증해 주는 표다.

세례의 세 번째 특성은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가 되어 그의 모든 선한 것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 것에 대한 증표라는 것이다(4권 15장 6절). 신자는 세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갈 3:26-27). 사도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마 28:19)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하였다(행 8:16; 19:5). 세례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선물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관용과 호의를 베푸시고 그 은혜 안으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주신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렇게 신자의 정결함과 중생이 그 모든 원인을 아버지 안에서, 그 질료를 아들 안에서, 그 효력을 성령 안에서 얻어진다(4권 16장 6절). 이렇게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 세례 요한이 먼저 베풀고 사도들이 그 다음으로 베풀었던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막 1:4; 눅 3:3; 마 3:6; 요 3:23; 행 2:38, 41)를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례는 그것을 행하는 손이 다르다고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세례 요한과 사도들은 모두 회개에 이르는 세례, 곧 회개와 죄사함이 있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주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의의 화목주이시자 구원의 조성자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지신 분이다. 요한의 세례는 그 동일하신 오실 분 안에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그 동일하신 이미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분 안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4권 15장 7절 적용). 그러므로 크리소스토무스가 세례 요한의 세례에는 죄사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 인류에 대한 사기극이다.

사도들이 베푼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라 불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세례가 세례 요한의 것보다 더 많은 성령의 풍성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4권 15장 8절). 칼뱅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물로 세례를 베푸는 데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한 것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신분과 그리스도의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신앙 자세는 오늘날 세례를 베푸는 목회자들이 깊이 새기고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관련하여 세례를 베푸는 자가 누구이던 간에 그리스도가 감독하신다는 말로써 간단하게 정리하였다(4권 15장 8절).

이제 세례를 통한 ‘자기 자신’(우리)의 죽임의 의미를 고찰할 때다. 이 죽음은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의 죽음을 말한다. 칼뱅은 원죄를 “먼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 속한 범죄자들로 삼고 또한 성경에서 칭하는 “육체의 일”(갈 5:19)을 우리 안에서 양산하는 우리 본성의 불량과 오염”(4권 15장 10절, 539.)라고 정의하였다. 그가 본 원죄는 우리 본성의 불량과 오염이었다. 이 원죄는 유아들조차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인생이 원죄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시 51:5). 의와 무죄함과 순수함 외에 그 무엇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죽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베푸셔서 원죄인 우리의 본성의 불량과 오염을 죽게 하신 것이다. 우리(자기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세례를 통하여 죽게 된 것이다.

세례는 원죄를 죽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의 죄에 대하여도 죽을 때까지 죽인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원죄에 대하여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사악함은 우리 가운데서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정욕을 사용하여 쉼 없이 육체의 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육체의 감옥에 갇혀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의 잔재들이 우리 안에 거주하여 준동하면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이에 대해 세례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죄가 우리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세례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음으로 굳게 붙잡을 수 있기에 세례 이후에 저지르는 모든 죄가 우리를 지배하거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5권 15장 11절).

이상에서 세례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원죄)를 죽임과 함께 우리의 육체의 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죄를 죽을 때까지 죽이는 것임이 드러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죽임과 동시에 그 죽임이 세례에 의해서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하여 본성은 죽었다. 그러나 본성의 사악함이 남아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자기의 욕정에 탐닉하게 하여 육체의 죄악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이 죄악에 빠져 비참한 예속의 사슬에 묶여 사로잡혀 있기 일쑤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기에 우리는 이 죄악들과 항구적인 싸움을 하며,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영적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4권 15장 12절 적용).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세우고, 자라게 하고, 확정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공언할 수 있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 신자는 세례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듯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물세례의 표증을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의 원죄가 사해지고, 우리의 육체의 일들의 범죄들이 사해짐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씻기시며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아들의 죽음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사탄의 나라를 몰아내시며 우리의 정욕을 무기력하게 하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옷 입게 하시며,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5권 15장 14절).

그렇다고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과 우리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창 17:7) 그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가 유아에게 시행되기 전에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진리라는 사실 또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4권 15장 20절 적용). 유아가 물에 잠기기 전에 현세의 삶을 떠난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가로막힐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세례가 행해져야만 구원이 확증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세례가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교리는 그릇된 해석이자 많은 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로마교회의 세례조례가 그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행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세례를 행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마 18:19)이기 때문이다. 세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의 세례에 대한 맹복적인 불신에 빠져 있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례를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미쁘심은 폐함이 없으며(롬 3:3), 세례에 대하여 사람이 신의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영원히 구원으로 남아 계신다(5권 15장 17절). 그래서 세례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며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

칼뱅은 바람직한 세례의 예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세례를 받을 자를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시키고 모든 교인이 증인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세례를 베푼다. 둘째, 모두가 기도하며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셋째, 입교자로 하여금 신앙고백을 암송하게 한다. 넷째, 세례자가 세례를 통해 누리게 되는 약속들을 설명한다. 다섯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리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세례 받은 자를 돌려보낸다(4권 15장 19절).

세례를 베풀 때 물에 몸을 잠기게 할지, 한 번 잠기게 할지 세 번 잠기게 할지, 혹은 부어 놓은 물로 세례 받는 사람에게 뿌릴지 등은 교회에 자유롭게 맡겨야 한다. 고대에는 세례의 원뜻인 ‘잠근다’에 따라 교회에서 물에 잠그는 의식이 지켜졌었다.

세례가 하나님의 부르신 명칭일진대 그것은 죄사함에 대한 약속, 육체를 죽임에 대한 약속, 영적인 살림에 대한 약속, 그리스도에 참여함에 대한 약속 일체를 지니고 있다(4권 15장 16절). 그래서 세례는 다시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재세례파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세례 시에 성경이 증언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다른 것도 덧붙여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부식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기 위하여 탄식하는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서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사함을 의지해서 죄를 지을 기회와 방종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 대신에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만이 있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원죄의 사함을 받음은 물론 원죄의 잔재로 인해 육체의 죽음 때까지 저지르게 되는 죄악들을 죽이는 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참 회개를 위해서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죄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중생의 의미를 지니는 데 그 자체가 세례의 특성과 같기 때문이다. 세례가 ‘회개의 세례’라고 불리는 이유다.

참 신자들이여! 날마다 세례를 받으며 또한 회개하며 살아가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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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2023-08-29 12:01:45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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