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둘러보기(41) - 교리와 교회 회의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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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둘러보기(41) - 교리와 교회 회의의 권위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7.1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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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칼뱅이 말하는 교회의 권위는 교회의 고유한 영적인 권세로써 교리와 재판권과 입법권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는 이유는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백성의 일꾼이라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기독교강요 4권 8장 1절 적용).

교리와 관련한 권위는 직접적으로는 교의를 가르치는 권위와 교의를 설명하는 권위 두 부분으로 핵심을 이룬다(4권 8장 1절). 이 권위들은 근본적으로 주님(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에서 비롯된다. 모세가 사전에 자기가 전해야 할 계명들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출 3:4-12). 또한 교리의 권위 다음으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회의들의 권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체의 교회회의의 주관자는 그리스도다(4권 9장 1절 적용). 그렇다면 로마교회의 회의와 교령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모든 교회의 회의들(당회, 노회, 총회 회의 포함)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권위 안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본 글에서는 교회의 권위인 교리의 권위, 입법권, 그리고 재판권 가운데서 첫 주제인 교리의 권위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교회의 모든 회의들의 권위 문제를 분석한다.(입법권과 재판권의 권위와 관련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루어진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교리의 권위는 주님과 말씀에서 비롯된다. 모세 외에 에스겔도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6~17)는 명령에 따라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였다. 이사야는 심지어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이었음에도 스스로 자기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하였다(사 6:5). 예레미야는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른다고까지 할 정도였다(렘 1:6). 모세를 비롯해서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의를 가르치는 사람들(목사들)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하려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4권 8장 2절 적용).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해주신 말씀과 계명을 전하고 행한 실천자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믿음생활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였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몸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요 7:16)이라고 하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하신 영원한 모사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의 직분을 이런 수준에서 철저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말씀을 가르치며 설명하는 모든 목사들(교역자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모세와 제자장과 여러 선지자들, 사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교리의 권위가 교역자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의 가르치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 사도들의 믿음의 삶의 실천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벧전 4:11) 하였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답게 확신을 가지고 스스럼없이 하나님의 계명들과 순수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4권 8장 9절 적용).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유일한 지혜와 빛과 진리이신 아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신다(4권 8장 5절 적용).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러므로 목회자의 교리의 권위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그리고 이를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성령님을 믿고 전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기에 로마교회주의자들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라는 말씀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로마 대사제들이 육성으로 그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다. 교회는 성경 말씀을 벗어난 교리는 물론 어떠한 교회 관례나 교회 관습도 새로 제정할 수 없다(4권 8장 14절 적용).

일체의 교회회의를 주관하시는 분 역시 그리스도시다. 따라서 교회회의의 권위 역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위를 자신 이외에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회의를 주관하시는 한 그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이상 4권 9장 1절 적용).

교회회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권리와 권위는 설령 목사들을 비롯해서 일부 신자들 또는 사람들이 말씀과 성령을 어겨서 어떤 불법한 일들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영원히 존속된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회의를 사리사욕을 좇아 자의적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권위는 그들에 의해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그것에 휘둘려져서 교회 자체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히 여전히 그리스도의 교회다.

그 증거들이 있다. 이사야의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 ”(사 56:10~11)라는 증언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교역자들은 맹인이자 개들이었다. 에스겔의 고발은 더욱 신랄하다.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겔 22:25~26). 바울은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히 파수꾼이나 선지자나 이리들의 사악함에 아랑곳없이 그리스도이실 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 역시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자녀들이다. 교회회의 등을 통해서 아무리 사악한 목사들이 사욕을 좇아 횡포를 부린다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리스도시며 그의 자녀는 여전히 그의 자녀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일체의 교회회의에 대해 지금과 영원히 권위를 지닌다는 증표다.

그러나 교회회의 자체를 임의로 사악하게 이끌고 세속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목사들은 자신들이 이사야의 증언대로 맹인 아니면 벙어리 개들, 또는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자, 또는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는 자, 과부를 많게 하는 자,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 부정함과 정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 안식일을 보지 못하는 자, 하나님을 더럽히는 자 등으로 심판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실한 신자들은 교회의 회의내용을 전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모든 신자는 어떤 교회 회의의 교령(a decree of any council)이 공표될 때 그것이 어느 때, 어떤 의제로, 어떤 취지로 개최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그곳에 참석했는지를 숙고해야 한다(4권 9장 8절). 동시에 그것이 성경의 표준에 부합하는지, 그 회의의 성격이 무엇인지 등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막시미누스를 반박하면서 제시한 명령은 그 좋은 예가 된다. “니케아 회의를 내세워 내가 당신에 대해 예단해서는 안 되듯이, 당신 역시 아리미눔 회의를 내세워 나에 대해서 예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리미눔 회의에 종속되지 않듯이, 당신 역시 니케아 회의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에 따라서 사안은 사안과, 원인은 원인과, 논리는 논리와 서로 맞서게 해야”(4권 9장 8절)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회의에 대하여 믿음으로 처신한 방식이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목회(인도)자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8)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신자들에게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라고 알려주어서 경계하게 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고 당부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물론 목사들의 말이나 권고, 교회회의의 내용(교령 포함) 등을 우리의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서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시험하는 것이 필요하다(4권 9장 12절 적용).

모든 교회들이 교리에 대한 논쟁을 대처하기 위해 감독(목자, 노회장 등)들이 모여 회의 안에서 처리하는 것은 성경적이며 바람직하다. 목사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영에 호소하는 가운데 일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개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사적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무게감이 있다. 이러한 회의를 통해 그들이 서로 편리하게 심사숙고하는 중에 다양한 입장차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도 방지할 수 있다. 심각한 사안들이 있을 때 교회들이 모여서 심리하여 채택하는 것 역시 훌륭한 믿음의 처사들이다. 이러한 예로써 아리우스(Arius)가 흥기했을 때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어 그 권위로 그의 사악한 시도를 분쇄했던 것이나. 유노미오스(Eunomios)와 마케도니오스(Macedonios)가 소요를 일으켰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를 통해 그에 적절한 처방을 내렸던 것을 들 수 있다(4권 9장 13절).

로마교회회의 주재자들과 사리사욕의 방식으로 교회회의를 주재하는 자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든 어떤 교회회의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성경을 승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없는 연옥, 성자들의 중재, 비밀고해, 그리고 유사한 다른 것들은 모두 사기요 거짓이다. 같은 이유에서 로마교회가 콘스탄트 회의에서 평신도에게 잔이 주어지는 것을 금하고 사제만 마시게 한 것은 오만이요 거짓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회의를 통해 각종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지된 유대주의를 다시 일으켜 악을 도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요한 사도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고 하고는 곧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2~23)라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니까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그 하나님과 예배를 위한 모든 것을 상의하면 된다. 말씀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지, 헌금이나 십일조를 얼마를 드릴지, 어떤 봉사를 할지, 등등 일체의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 답이라는 것은 자신이 이렇게 하면 그리스도가 기뻐하실 것이라고 마음에 믿어지는 그대로 하는 것이다.

모든 교리들과 교회회의들(교령)은 모든 예배자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물으며 결정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하는 것들이어야 한다. 교리와 교회회의들(교령)이 모든 예배자들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며 헌신하며 하나가 되도록 이끄는 것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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