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5) -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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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5) - 성례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8.2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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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성례는 헬라어로는 ‘뮈스테리온’(μστήριον, 비밀)이고 라틴어로는 ‘사크라멘트’(sacramentum)의 우리말 번역 용어다. 성례(聖禮)는 한자어로써 ‘거룩한 예식’을 의미한다.

‘뮈스테리온’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엡 1:9).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2-3).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이……”(골 1:26-27).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번역가들이 ‘뮈스테리온’을 번역할 때, 특히 그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나타날 때는 라틴어로는 ‘사크라멘툼’을 사용하였다. 그들이 ‘뮈스테리온’을 ‘사크라멘툼’으로 번역한 것은 (하나님의) ‘본체의 장엄함’을 낮추어 표현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은밀한 것’(acrcanum)이라는 용어 대신에 숭고하고 영적인 본체의 존엄한 표상을 지닌 표징(임)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sacrament’(sacred thing)을 사용한 것이었다(4권 14장 2절).

성례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성례가 제정된 목적과 현재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칼뱅은 성례를 주님이 우리 믿음의 연약함을 지탱해 주시려고 우리를 향한 자기의 자애로우심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적 징표로 이해하였다(4권 14장 1절 적용). 이 성례는 우리에게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을 주님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는 징표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외적인 징표로써 확정되는 증언이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를 “거룩한 본체에 대한 보이는 표징” 내지는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형상”(4권 14장 1절)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의에는 약간의 모호함이 담겨 있긴 하다.

성례가 하나님의 비밀과 관련된다면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성례는 일종의 부록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되어 그 자체를 견고하게 하고, 인치고,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여 비준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확고하고 확실하여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좋은 확정을 받을 수 없기에 성례는 기껏해야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로 드러나게 하는 보조 역할이나 수행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성례의 실제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성례에는 대표적으로 세례와 성찬이 있다. 세례의 표징은 물과 씻음이다. 하지만 이 세례의 본체의 진리는 그리스도다. 성찬의 표징은 떡과 잔이다. 그 본체의 진리는 그리스도이며 그의 피와 살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닮은 선한 양심의 간구이어야 한다(벧전 3:21). 하나님께서 믿음의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셨던 모든 표징들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다면 전혀 성립될 수 없으며 가치가 없다. 이에 따라 신자는 사역자들에 의해서 성례적인 용어들이 언급되는 것을 들을 때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이해하려 해야 한다(4권 14장 4절).

성례의 유익함이 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자신의 칭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은 언약에 대한 인칭(인증)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할례라는 성례에 의해서 인증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할례라는 성례의 거행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행해지는 것이기에 말씀(의 약속)으로만 받았던 것보다는 뛰어난 증거 능력을 제공한다(4권 14장 5절 적용). 이것이 성례가 주는 유익이다. 여타의 성례도 모두 할례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성례가 자신의 눈앞에 놓일 때 거기에 육체적인 시선을 두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단계적인 경건한 숙고를 통해 그것에 숨겨져 있는 숭고한 비밀들을 향해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4권 14장 5절).

성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들에 앞선다는 것은 진리다. 언약의 법이 (성례의) 징표에 의해 인증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육체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성례라는 육체적 증표로 주신 것이다. 신자가 육체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그 이전에 말씀이 증언하듯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는 의미를 말씀(갈 3:27)의 깨우침을 전제로 하는 인증절차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다 한 성령을 마신다(고전 12:12-13).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언이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의 정서를 새기는 인장(도장)이다(4권 14장 7절). 성례의 행함은 그 인침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 자체를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확정하고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성례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말은 귀신들려 심히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의 아버지의 고백과 같아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성례는 주님에 의해 빼앗겨질 수도 있다. 주님은 그가 성례 안에서 약속하셨던 일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철회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실 때에는 성례 자체를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신다. 예컨대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혹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담이 영생하는 과일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 그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라고 한 말도 이와 비슷하다. 할례라는 약속의 표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언약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영생하는 과일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할례가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하시다고 여기실 때 사용하시는 수단과 도구들이다. 떡과 태양과 불 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해 나누어주시는 도구들이 아니라면 그것들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례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도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확신이 성례에 부착되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례로 돌려져서도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성례이든 만물이든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한 분에게로만 올라가야 한다(4권 14장 12절).

성례 시 신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다. 하나는 성례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사람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공표하는 것임을 믿는 마음이다(4권 14장 13절). 교황주의자들이 하나님이 부여하셨다는 거짓으로 성례에 믿을 수 없는 모종의 은밀한 능력들을 부착시킨 것은 사악한 일이었다. 그러한 성례들은 신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헛된 것을 좇아 떨어져 나가게 한다. 신자들이 성례에 참여하여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에 안주한다면 성례에 참여한 것이 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 안에 형상(the figure)과 실제(the truth)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4권 14장 15절). 즉 보이는 형상을 단순히 외적으로 먹는 것이 성례가 아니고 내적으로 먹는 자에게(형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이로 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자에게만 성례가 (실체가 포함된) 성례가 된다는 말이다. 성례는 공허한 표징으로만이 아니라 표징과 함께 믿음으로써 그것에 포함된 말씀을 이해하는 성례(참여)일 때 그 본체를 가진다. 외적인 징표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육체의 일로 그칠 뿐이다. 모든 신자는 가룟 유다가 만찬에서 예수님의 떡을 받고 죽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성례의 질료(the matter) 내지는 실체(the substance of all the sacraments)이시다(4권 14장 16절).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례는 사람이 그것에 어떤 악한 요소들을 덧붙인다 하더라도 전혀 손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황주의자들이 그 당시 자행하고 있던 사악한 성례들에 대한 조롱이었다. 사람이 만드는 어떠한 성례도 성례가 아니다. 사람이 만든 어떠한 성례도 하나님의 참 성례를 해치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모든 성례의 질료이시자 실체이시기에 하나님의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처럼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하늘 은혜의 보화만을 제공하고 제시한다. 성례 자체가 하늘의 은혜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를 성례라는 보이는 표징을 통하여 그것을 선언하고 보여준다(4권 14장 17절 적용). 성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담보물로써 하나님 자신의 표징 가운데 약속하시고 표상하여 행해지는 예식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성례에 참여하여 은혜를 구할 때 포도주가 잔에 부어지듯이 그렇게 보이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성례를 통해 얻어지는 은혜는 전적으로 내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확고하게 하셔서 성령의 내적 예증을 통해 준비된 우리의 마음이 성례에 의해 부여하는 확정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엡 4:30). 성령의 조명으로 외적인 말씀과 성례가 우리의 귀로부터 우리의 영혼으로 옮겨지는 것이다(4권 14장 10절).

성례에 참여하는 신자는 표징과 실체의 결합과 분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경계할 일이 있다. 하나는 표징을 받을 때, 그것이 헛되게 주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받아서 그 표징(포도주와 떡)의 은밀한 의미를 파괴시키고 약화시켜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표징 너머로 들어 올리지 않고, 그 표징에 오직 한 분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부여된 선한 것들에 대해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4권 14장 16절).

성례의 범위는 넓다.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에 대한 실제를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사람들에게 친히 명령하신 모든 표징들이 성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명나무(창 2:9, 3:22), 무지개(창 9:13~16), 연기나는 화로(창 15:17), 이슬로 양털을 적심(삿 6:37~38),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가게 함(왕하 20:9~11, 사 38:17) 등등이 모두 성례에 속한다(4권 14장 18절 적용). 즉, 성례란 단지 외적인 표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훈련시킴으로써 내적인 믿음을 자라게 하고, 자극시키며, 확정시키는 일체의 종교 의식이라 할 수 있다(4권 14장 19절).

이 의미가 좀 더 확장되면 그리스도 자신이 성례이자 언약이 되신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범법으로 인하여 짓눌려 있는 허물과 죄를 벗겨내 주시고 소멸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의 독생하신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는 이에 응하여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고백 가운데 열의를 다함으로써 경건과 무죄함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그에게 묶게 된다.”(4권 14장 19절)라는 크리소스토무스의 말은 참고할 만하다.

한편 할례와 세례와 정결례 등이 모두 그리스도를 인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례들이다(4권 14장 21절).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씨로부터 난 것, 즉 인류 전체의 본성이 타락하여 가지치기의 필요성을 일깨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복된 씨(그리스도: 갈 3:16)임을 확정시킨다. 세례와 정결례는 각각 그들(유대인들 및 모든 사람)의 본성의 불결함, 음란, 오염 등을 드러내며 모든 더러움이 씻기는 또 다른 씻음의 약속(그리스도가 씻음이시다)임을 표상한다. 한편 희생제물은 유대인(모든 사람들) 자신의 불법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죗값의 무름의 필요성을 드러내어 그리스도가 대제사장(히 4:3, 5:5, 9:11)이 되심을 분명히 한다. 요약하면 유대인의 성례들은 표징에 있어서는 다양했으나 본체는 같았고, 외양으로는 다양했으나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같았다(4권 14장 26절).

결론을 맺자. 옛날이나 오늘이나 성례는 모두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애로우심과 성령의 은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된 것이다. 신자들은 이 성례를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돌려질 공적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성례의 의식들이 성육신의 현현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뿐이다. 신자로서 우리는 모든 성례에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간구하면서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참여하고 하나님의 은혜 주심에 응답하여 우리의 믿음을 자라가게 해야 한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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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2023-08-22 16:28:34
좋은 글 항상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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