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44)-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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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44)- 맹세
  • 합동투데이
  • 승인 2023.08.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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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전백석대교수 •교육학박사, 본지논설위원)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약속을 맹세(서원)라 한다(4권 13장 1절).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할 때조차도 그 당사자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들이거나 약속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의무로 삼을 만한 일들로써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약속할 때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하며 최고의 진지함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맹세를 하기 위해서 사람은 두 가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질서 있게 영유하기 위한 (맹세의) 필요조건들이 모두 율법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사람이 새로운 일들을 고안해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에 대한 모든 찬미를 그 자신의 단순한 뜻에 대한 순종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4권 13장 1절 적용).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떠한 맹세도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보이셨던 순종을 푯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신자의 맹세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 첫째는 “누구에게 맹세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해답을 찾는 일이다(4권 13장 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시지만 사람 자신의 자의적 숭배는 저주하신다. 맹세라는 명목으로 계명을 떠나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맹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둘째는 “맹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그에 대한 해답이다(4권 13장 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 은총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물을 주장하는 자들로 조성하셨고 만물을 우리 자신에게 종속시켜 편의를 누리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멸시하고 우리가 맹세하여 지킨답시고 우리를 도와야 할 외적인 것들에 굴복하고 예속당하는 그런 의무의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신자가 자유의 은총을 받은 존재를 보존하며 지킬 수 있는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에 따를 때이다. 

그 셋째는 “무슨 의도로 맹세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찾는 것이다(4권 13장 4절). 칼뱅은 맹세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승인을 받으려 한다면 우리의 의도가 어떠한 지를 살피라고 충고한다. 

그는 맹세의 목적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과거와 관련된 맹세의 목적과 미래와 관련된 맹세의 목적이 각각 두 가지다. 먼저 과거와 관련된 맹세에는 ‘감사의 실천’과 ‘회개의 실천’의 목적을 들었다(4권 13장 5절). 감사의 실천의 예로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창 28:20~23)한 것이나 경건한 왕들이나 지도자들이 의로운 전쟁을 시작할 할 때 자기들에게 승리가 주어지면 드리겠다고 맹세한 화목제가 있다. 회개의 실천은 맹세를 통한 자신의 무절제를 징계하는 형식으로 한동안 사치스러운 음식을 절제하거나 자기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다. 한편 미래와 관련된 맹세에는 ‘신중하게 함’과 ‘직분에 대한 깨달음’을 들었다(4권 13장 5절). 미래에 대하여 맹세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신중하게 될 수 있다. 신자가 자신에게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경향이 있어서 게을러지거나 할 때 일정 기단 동안 그것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자신이 경건의 필연적 의무들을 망각할 때 맹세하고서 새롭게 기억하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다. 

칼뱅은 이러한 맹세를 합법적인 맹세로 보았다. 합법적인 맹세의 특성은 외적인 사안들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신 승인에 의해 받쳐지고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재능으로 한정되는 그런 맹세이다(4권 13장 5절 적용).  

칼뱅은 자신의 시대에 주님께서 자기 피의 측량할 수 없는 값으로 사셔서 자유롭게 하신 교회가 (교황주의자들과 로마교회의) 사악한 독재에 억눌리고 거대한 전통이나 로마교회가 고안해 낸 온갖 거짓 맹세들로 인해 폐해를 당하고 있는 실상에 의분을 일으켰다. 그 당시의 소위 ‘목회자’라는 자들도 이 비참한 영혼들을 자기들의 사악한 법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4권 13장 1절). 

칼뱅은 이 사악한 타락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맹세와 관련하여 성경적인 규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법적인 맹세의 정립, 특히 성경에 일치하는 합법적인 맹세를 논증해 내는 데 진력하였다. 합법적 맹세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율법과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맹세는 공통의 맹세와 개별 맹세의 두 유형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세례를 받을 때 행해지는 공통의 맹세가 중요하다. 이 맹세는 신앙교육서와 성찬을 받음으로써 행해진다. 이때 행해지는 성례들은 계약들과 같은 데, 이 성례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이로부터 영생을 부여하시며, 이에 대해서 우리는 그에게 순종을 약속하게 한다. 게다가 성례의 계약조항 안에는 죄사함만이 아니라 성화의 성령을 담고 있는 은혜 언약이 포함되어 있다(4권 13장 6절).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례와 같은 공통의 맹세는 성경의 계약조항에 따라서 하는 것으로서 은총에 대한 간청과 도움에 대한 애원, 그리고 우리의 순종이 결합되어 있는 맹세이다. 한편 개별 맹세들 역시 이러한 공식에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맹세는 공통의 경우든 개별의 경우든 신중하고 시의적절해야 한다. 

반면에 위선자들은 예컨대 거룩한 장소들에 서원적인 순례를 하는 것 등을 큰 지혜라고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이 맹세를 성스럽게 지킨답시고 때에 따라서는 그 여행을 맨발로 하거나 나체로 하였다. 이런 쓸데없는 짓들을 행했음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스스로 범상치 않은 의를 얻었다고 믿었다. 더 한심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저 수준 낮은 맹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수도사들의 맹세의 삶은 이러한 위선자들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먼저 수도원 학교들은 교회의 직제에 따른 일종의 신학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도사들은 모두 이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감독의 직무에 대한 부름을 받았다. 옛날의 수도원(칼뱅 당시 로마교회의 수도원이 아니다)에는 최고의 준엄함과 인내를 훈련받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유혹들을 경멸하고 함께 모여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거룩한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며, 독서하며, 토론하며, 교만에 부풀어 있지 않고, 완고함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으며, 시기에 가득 차서 안색이 변하는 경우도 없었다.……신부들은 품행에 있어서 가장 거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리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나고 모든 사안을 다룸에 있어서 월등하였다.……”(4권 13장 9절).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밀라노의 수도원과 다른 수도원의 준엄함을 예찬하였다. “이런 형편에 있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가혹한 것들이 강요되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가 거절하는 짐을 지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가 너무 약하기에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따라할 여력이 없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정죄되지 않는다.……그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자기들의 육욕을 길들이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지켜 가는 데 있다.……무엇보다도 사랑이 수호되어야 한다. 사랑에 부합하게 먹고, 사랑에 부합하게 말하고, 사랑에 부합하게 입고, 사랑에 부합하게 표정을 지어야 한다.……”(4권 13장 9절).

칼뱅은 자신의 시대의 수도원이 옷의 색이나 모양, 음식의 종류, 하찮고 무미건조한 의식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비난하였다. 그 당시 수도사들이 그 자신들의 한가함을 내세워서 그들을 신성하게 보이려 하는 것을 강하게 힐난하였다.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의 경건에는 만족해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보다 더 완전해지려고 일종의 관망(명상)을 통한 경건의 모습을 새로이 꿈꾸고 있다고 비난하였다(4권 13장 10절). 

이에 그치지 않고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 “보복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등의 복음적 권고들을 약속(맹세)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칭 일반 신자들에게 비해서 더 많은 복음의 짐을 지고 있는 냥 교만을 떨었던 것이다. 칼뱅은 그들이 수도원 제도가 모든 것 중에서 완전함을 얻는 최고의 길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완전하다고 자랑하는 것도 비난하였다. 그들이 일반 성도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과시하려 들 때, 배우지 못한 자들과 무지한 젊은이들에게 올가미를 놓으려고 들 때, 또 자신들의 특권들을 주장하려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가해서 그들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고 할 때 마다 그들이 수도원의 완전함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완전함을 내세우는 것을 모질게 비판했던 것이다(4권 13장 11절 적용).

이외에도 로마교회의 수도사들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라는 말씀을 빙자하여 자신들은 소유에 관심이 없기에 온전하다고 자랑하며 떠벌여댔다. 그들은 그 젊은이가 실제로 재산을 팔았을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수도사들은 단지 이 말씀을 자기들 입맛대로 난도질해서 사제가 되기 위해 자기들이 소유를 포기했다고 자랑하기 위해 악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어떤 한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율법적 차원에서 질문한 것이기에 주님께서도 율법적으로 답하신 내용을 보여주신 것일 뿐이었다. 단순히 옛날에 여호와께서 율법을 통하여 가르치셨던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고 계심에 대한 예증이라는 것이다(4권 13장 13절). 그 핵심은 설령 율법을 지켜서 재산을 팔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복음의 선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데 있다. 

칼뱅은 수도사들이 급기야 수도원의 서원을 세례(그들은 이를 제2의 세례라고 하였다)와 비교하면서 이중적인 기독교를 만들어내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교회와의 단절이었으며 결국 고대의 수도사들과는 달리 사적으로 제단을 세워 교회를 분립시켰다는 비난이었다. 모든 수도원이 분파주의자들의 소모임으로 전락하면서 그곳에는 그리스도 대신에 베네딕트 파, 프란체스카 파, 도미니크 파라고 불리는 분파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다(4권 13장 14절 적용). 여기에 수도사들의 추악한 품행이 자행되면서 수도원들 중 열에 아홉은 순결한 곳이 아니라 매음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원에서 몰락한 사람보다 더 타락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탄식하였다(이상 4권 13장 15절).

이 사악하고 불법적인 맹세로부터 돌아올 수 있는 길, 즉 소위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자신들을 하나님과 교회에 묶는 이 ‘풀 수 없는 고리’를 깨뜨리는 길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사람이 확정한 맹세를 하나님이 철회해 주시는 것이다. 둘째는 진리를 아는 지식(성령)의 조명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원하시기에 로마교회의 저 불가능한 맹세가 그 영혼을 확실히 파멸케 하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 맹세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4권 13장 21절).  

현실적으로 모든 신자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온갖 맹세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신자가 스스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꿈을 꾸며 욕심을 내는 순간 즉시로 허다한 거짓되고 불법적인 맹세를 자행하기 쉬운 환경 속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간의 재산을 증식시키겠다거나, 일정량의 지식을 쌓겠다거나, 어떤 소원을 이루겠다거나 하는 등등의 맹세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욕심을 따라 쉴 새 없이 맹세를 해놓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포장하거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세속의 온갖 규례와 관습, 심지어는 윤리 등을 따른답시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 없는 맹세를 해대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참 신자라면 이러한 맹세들로부터 돌아서서 합법적인 맹세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합법적 맹세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맹세를 할 때 세례와 같은 공통의 맹세를 기억하면서 감사와 회개, 신중함과 직분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맹세를 해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영생을 소망하며, 주님께 우리의 순종을 약속하는 계약에 따른 맹세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중에 혹시 거짓된 맹세를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 맹세를 철회해 주실 것을 구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맹세(서원)의 자유를 찾아 누려야 한다. 말씀을 읽겠다는 자유의 맹세, 기도와 사랑과 봉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등등의 맹세의 자유를 끝없이 향유하는 것이다. 

대한의 참 신자들이여! 이제는 거짓 맹세의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자유함을 받은 자들이 되어 진리를 사수하며 영혼을 살찌우는 맹세의 삶을 향유하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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