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0) - 로마교황청의 수위권의 실상과 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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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0) - 로마교황청의 수위권의 실상과 그 비판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7.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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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로마교회와 교황청이 주장하는 권리는 그들에게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머리(교황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교황을 중심으로 그에게 순종을 다하면서 붙어 있어야만 교회가 하나 되고 나뉘거나 흩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어설픈 교황의 수위권을 활용해서 그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4권 6장 1절 적용). 이 교황의 수위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교황(로마대사제)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보편교회를 다스리며 로마교구가 다른 교구들에 대하여 우선이라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4권 6장 2절).

로마교회와 교황청은 우선 율법에 규정된 대제사장의 직분과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수립하신 최고의 법정을 자신들의 교회계급제도에 악용하였다. 즉, 대제사장 직책이 예부터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유대인의 예배와 예루살렘 교회의 일을 관장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칼뱅은 이들의 논리를 말씀으로 단 칼에 해부해 버린다. 대제사장의 규례는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유대인들이 다양한 종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를 마련하시고 한 제사장을 세워 서로 하나됨을 잘 지켜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주장했다. 대제사장의 권리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에게로 옮겨졌다. 그리스도 주님은 지금도 대리인이나 후계자 없이 친히 이 권리를 담당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담당하시는 대제자장 직분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성취하게 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시는 사역으로 계속되고 있다(4권 6장 2절 적용).

로마교회와 교황청은 그들의 수위권의 신약적 근거도 찾고자 하였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와 “(베드로야) 네가……나를……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라”(요 21:15)는 말씀들이다.

이에 대해서도 칼뱅은 이 말씀들의 의미를 파헤쳐서 그들을 교정하고 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로부터 양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아니라 교화에 대한 권세가 위임된 것이라는 것이다. 매고 푸는 권세는 교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4권 6장 3절).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벧전 5:1)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동역자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 5:2)라고 하여 자기 직분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이런 베드로가 도대체 교회에 대하여 무슨 권세를 가졌다는 것인가. 한편 ‘열쇠’에 대한 해석 역시 로마교황제주의자들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칼뱅은 열쇠를 ‘복음의 가르침으로 인해 하늘이 열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매고 풀린다’는 것은 사람이 불신앙으로 인해 더욱 많은 억압(사탄으로부터)을 받는 것이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4권 6장 4절). 매고 풀리는 것은 사도가 감당해야 하는 고상한 직분을 상징한다. 만약에 이 진실이 교황에게도 적용되었다면 교황의 매고 풀리는 직무를 감당하는 주장을 비난할 자 아무도 없다.

베드로가 주님께로부터 특별히 자기의 그 이름을 이러한 직분을 받은 것은 교황주의자들 못지않게 칼뱅도 인정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으뜸가는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며, 그 당시에 그는 신자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신자였다(4권 6장 5절). 그렇다 하더라도 베드로에게 교회에 대한 수위권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영예는 돌려질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어쩌면 안드레에게 수위권이 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관습을 따를 때 예컨대 열 두 사람이 모여서 그 중에서 한 사람을 자신들을 다스릴 자로 여기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회의 주관자가 없는 연합체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반대로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적용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지도자 두루미나 지도자 벌이 각각 하나의 개체로써 나머지를 지도한다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개체들 전체를 지도하는 우두머리는 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기 때문이다(4권 6장 8절 적용). 다만 이 사실로부터 추론되는 것은 모든 교회마다 소속된 주교가 따로 있어야 함을 확인케 한다.

바울이 한 번 베드로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의 방문은 베드로에 대한 지가의 복종심을 공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과 베드로의 가르침이 일치해야 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베드로 역시 바울에게 어떠한 복종심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 연합체에 속한 동료로서 그와 악수하였다. 이들 두 사람이 주님의 포도원에서 서로 함께 일하는 동역자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교황의 수위권은 정당성이 전혀 없다.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은 처음에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사역하다가 로마로 옮겨 왔는데 그 때문에 수위권이 로마교회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교황 마르켈루스가 안디옥의 장로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통해서였다. “베드로의 감독좌가 처음에는 당신들과 함께 있었으나 이후에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첫째였던 안디옥 교회가 로마 교회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습니다.”(4권 6장 11절) 설령 베드로의 교구가 로마에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그 도시의 주교가 세계 전체를 주관해야 한다는 근거를 밝힐 방법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주교이자 사제의 직무를 다 하셨지만 어떤 지위도 갖지 않으셨다(4권 6장 11절).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터기 이스탄불에서 개최되었던 칼케돈 회의(451년 10월 8일 ~ 11월 1일)에서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교황 레오가 마르키아누스 황제와 풀케리아 황후에게 (로마교회에게) 첫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런데 로마교회 대표자들이 첫 번째 자리에 않았던 것은 에베소회의 때 동방의 감독들이 소요를 일으켰었는데 그 때문에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553년)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감독 멘나스(Mennas)가 회의를 주재했는데 로마교회의 감독들에게 첫 번째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이상 4권 7장 2절 적용).

칼뱅은 로마교황제의 성립 시기를 그레고리우스(Gregorius, 교황재위 590-604) 교황 시기 전후로 보았다. 그레고리우스가 “나는 자기의 죄를 발견한 감독으로서 사도적 교구에 복종하지 않을 자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로마 교회의 사도적 교구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죄가 없을 때에는 모든 감독이 겸손의 법칙에 따라 동등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모든 감독을 자신과 동등한 자들로 여기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이상 4권 7장 12절).

로마 교회의 수위권이 본격적으로 논쟁이 되기 시작한 것은 교회와는 관계없는 세속적 통치권 영역과 관련해서였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이 위협받게 되었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감독과 로마 감독 사이의 수도권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로마 대사제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교황 재위 401-417)가 “제국의 수도가 바뀐다고 해서 교회의 수도대감독이 속한 교구가 바뀔 필요가 없다”는 교령을 발표하여서(4권 7장 14절)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지키려 하였다.

로마교회의 수위권은 마우리키우스 황제(Maurice, 539 - 602)를 죽이고 그의 왕위를 차지한 포카스(Phocas, 547 - 610)가 서로마의 황제가 되어 보니파스 3세에게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의 수위가 되어야 한다고 승인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4권 7장 17절).

이후로 로마교회와 교황청의 횡포가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베르나두스의 로마 교회 비판에 따르면 로마로 모이는 자들은 지상 모든 곳의 야심가, 탐욕자, 성직 매매자, 불경한 자, 첩을 가진 자, 근친상간 자, 다양한 괴물들 등이었다. 교회와 일반 법정에서 “가난한 자들의 생명이 부자들이 밟고 다니는 거리에 뿌려져 있”을 정도로 가증스러운 재판이 자행되었다. “교회들이 갈가리 찢기고 사지가 잘린다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았다.” “대수도원장들은 주교에 의해 쫓겨나고, 주교들은 대주교들에 의해서 쫓겨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4권 7장 18절).

교황제의 최악의 불신앙적 요소는 세 가지다. 하나는 교황의 수위권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교황에 대한 징계 유보권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교황의 무오류설이다.

본래 로마교회가 주변에 알려져 있기는 하였다. 칼뱅에 따르면 아타나시우스(296/298? ~ 373년 5월 2일, 성자 성부의 동일본질 주장)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구 감독에서 축출되자 로마로 들어갔다. 그는 로마 교구의 권위에 의해서 적들의 광포함을 억제시키고 거기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경건한 자들이 확고한 신념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아타나시우스의 사건으로 인해 로마교회가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불순한 자들이 합법적인 재판을 피하기 위해, 또는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로마로 숨어들었는데 로마 감독들이 외부로부터 이런 자들에 대한 탄원들을 받아들여 해결하곤 하였다. 로마 감독들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특별한 권세를 지닌 것으로 착각하였다(이상 4권 7장 5절). 그들의 수위권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고대의 교회회의는 모두 각 지역의 수도대감독들이 그 지역의 감독들을 임명하도록 하고 있었다. 니케아 회의의 조규에 따르면 로마 감독의 감독 임명권은 단지 그 자신의 관구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4권 7장 6절 적용). 다른 감독을 충고하거나 견책하는 것도 당시 감독들 사이에서는 서로서로 자연스러웠다(4권 7장 7절 적용). 어떤 특정 교회도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보편회의를 소집할 권리도 있지 않았다(4권 7장 8절 적용).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상급재판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서를 날조하고 거짓을 선동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하나의 예는 아프리카에서 개최된 밀레비스 회의(여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참석하였는데)내용의 날조다. 본래 한 교구 내 문제를 교구 밖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막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밀레비스 회의에서 “해외로 상소하는 자들을 출교”하는 것이 가결되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이 “해외로 상소하는 자들은 교제로부터 끊어진다”는 결의 내용에 “만약 로마 교구에 상소하지 않는다면”을 첨가하여 날조한 것이다. 칼뱅은 로마 교황청이 제시하는 수위권과 관련한 일체의 비상한 문건들이 대부분 다 이런 것들이라고 비난한다(4권 7장 9절 적용).

유보권과 관련해서는 교황청이 스스로 로마 교구의 주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시고 아무 신문도 하지 않으신다고 억지로 고안해 낸 특권이었다. 일단 그들은 “신하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재판을 하지만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교묘하게 악용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교황이나 감독의 죄에 대해서는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헛소리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임의적으로 각색했던 것이다(4권 7장 19절). 이 자체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을 저질렀다.

교황의 무오류설은 교황청이 고대 교회의 문건들을 날조하여 교황의 권위를 존숭할 것을 끊임없이 시도하다가 고안된 논리였다. 교황이 끝까지 존숭을 받기 위해서는 결국 죄가 없다는 것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토대로 교황은 모든 교회회의보다도 더 위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무오류설의 근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는 말씀에서 찾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짓이다. 이 말씀은 결단코 가까이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아시고 베드로를 위하여 하신 것이었고, 멀리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시고 남아 있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죄에 빠져 고통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기도였다. 이 기도에는 오늘의 우리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교황청은 그리스도가 오직 베드로만을 죄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해석했던 것이고, 더 가증스럽게도 교황들만을 죄 없게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칼뱅은 그들에게 최고의 비웃음을 선물하고 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3)라고 말씀하셨으니, 베드로의 후계자(교황들)는 모두 다 사탄이라는 것이다(4권 7장 28절 적용).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제로 인해) “(나는) 깊은 바다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4권 7장 13절). 그렇다. 로마교회와 교황청이 수위권과 유보론과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한 거기에는 설교도 없고, 권징을 위한 어떤 돌봄도 없고, 교회를 향한 어떤 열정도 없고, 어떤 영적 활동도 없다. 그들은(교황 대사제 감독 등등) 그 당시 로마의 삶의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였다. 아니 오히려 묵시적으로 시인하였다. 그들의 권징 시행은 일반 신자들의 방자함에 재갈을 먹이려는 데 있었다(4권 7장 29절).

교황이나 대사제들이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복음의 교리가 다시 살아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배하게 되면 그들의 나라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고 교회를 지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공적으로 분산하게 만들며 하나님께 속한 것,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내세운다. 그래서 로마 대주교는 적그리스도다(4권 7장 25절 적용).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목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일반 성도들보다 수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유보하신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면서 일반 신자들에 세상의 삶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자신들에게 바르게 말하는 자들에게 징계권을 사용하여 재갈을 물리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하여 많은 목사들이 복음이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는 적그리스도가 된 것은 아닌가.

대한의 선한 목사들(노회장, 총회장 등)이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 일반을 가르치라. 성례를 거행하라. 교정과 권징을 하라. 그리하여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와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의 양심과 태도를 변화시켜 선한하고 착하고 거룩한 마음바탕을 가꾸어 가면서 동시에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이기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죽도록 헌신해야 한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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