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6) - 교회는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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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6) - 교회는 거룩하다
  • 김성윤 기자
  • 승인 2023.06.1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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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모든 면에서 완전한 교회 이외에는 어떤 교회도 교회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교회로 남을 곳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칼뱅의 입장이다(4권 1장 17절). 이러한 사정은 현재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하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아내로 세우사 주름 잡힌 것이 …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고 선포하였다. 이 설교 속에 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주님께서 친히 날마다 교회의 주름 잡힌 것을 펴시고 티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종국에는 주님의 깨끗하게 하심과 그의 거룩함으로 인해 거룩하게 되고야 만다. 어떤 교회이든지 그것이 지금은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주님의 깨끗하게 하심과 거룩함으로 인해 거룩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거룩함을 보증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시 89:3~4).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다.

이사야의 증언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백성들 사이에서와 통치자들 사이에서, 심지어는 제사장직을 담당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극심한 부패가 들끓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에도 바리새인들의 불경건과 방종에 젖은 삶이 예루살렘 교회 안팎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어떤 새로운 제단을 쌓지 않았었다. 즉 그들은 교회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 역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의 타락과 박해,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과 함께 동일한 제사를 드리고 공적인 종교의식들을 행하였다(4권 1장 19절). 이러한 사실들은 주님께서 세상이 지어진 이후 자기의 교회를 두시지 않으신 적이 없었으며 또한 때가 완성될 때까지 한시도 지기의 교회를 두시지 않을 때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4권 1장 17절). 중세의 키프아리누스도 “비록 교회에는 가라지나 순수하지 않은 그릇들이 있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교회를 떠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도록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오직 여호와께 속하며, 여호와께 또한 철장이 맡겨졌다.”(시 2:9, 계2:27)고 하여 교회의 거룩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에 부여되어 있는 열쇠의 권세로 인해 보증된다.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하는 데 이 사건은 교회 이외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죄사함이 오직 교회에 속한 시민들과 그 가족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성경이 증언하기 때문이다(시 33:14-24). 참으로 죄사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어떤 언약이나 연합은 있을 수 없다(4권 1장 20절). 거룩하신 하나님의 죄의 용서함이 있는 곳,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곳, 그리하여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 사역, 곧 복음의 선포와 준행에 전심과 전력으로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이 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친히 자신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될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직분을 영구적으로 수행하시기를 원하신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그들이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죽을 인생의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입혀지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 때문에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은 복음 선포와 성례의 거행 등에 온전히 헌신하여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신자들에게 분배되게 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한편 신자들은 그 누구도 교회(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공동체이지 개별 건물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떠나서는 안 된다. 모든 신자들은 각각 오직 주님의 열쇠의 권세를 두신 곳(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도 포함)에서만 죄사함을 찾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4권 1장 22절).

사실이 이러한데도 노바투스주의자들이나 재세례파자들은 자신들이 세례 가운데 중생해서 천사적인 삶에 이르게 되기에 더 이상의 죄의 용서는 필요치 않다는 헛소리를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공허한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는 교회로부터 구원의 닻을 낚아채기 위해서다(4권 1장 23절). 신자들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마땅히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교회는 또한 그 안에서 어떠한 죄일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거룩하다. 믿음의 족장들, 예컨대 야곱의 아들들과 다윗과 같은 이들은 오늘 우리(신자)들처럼 언약에 참여하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할례를 받았고, 의심할 바 없이 조상들의 열심에 힘입어 의와 순전함에 대하여도 교육은 자들이었다(4권 1장 24절).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 곧 요셉의 형들은 그들의 아우 요셉을 팔아먹었다. 르우벤은 음욕이 불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고,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의 원수들에게 교활한 술수와 잔악함을 베풀어 그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강탈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까지 죽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 33:28)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 믿음의 조상들의 죄까지도 사해주셨음을 충분히 알아차리게 한다. 또 다른 곳에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자들을 용서하시고 포용하시고 감싸 안아주심을 약속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3~4).

예레미야는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음란도 반역도 용서된다고 주장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솔로몬의 기도 역시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얼마나 굳게 믿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렘 8: 46-50).

하나님의 은혜 곧 죄의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관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풍성하게 흘러내릴 뿐이다. 저 하나님의 용서는 끊어지거나 감해지지 않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그가 은총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해서도조차도 성경은 이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였다. 고의로 범했든 무지로 범했든 그리스도가 친히 희생제물이 되시어 그 죄를 대속하는 것이다. 범죄들이 가득한 교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거두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이 자주 불신에 빠져 비틀거리고, 때로는 쓸데없는 맹세가 나오고, 분노에 불탈 때가 없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놓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며, 나아가 주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여러 악행들에 노골적으로 애쓰는 것 등을 부인할 수 없다(4권 1장 29절).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교제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사랑하심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한 교회의 권징은 그 권징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근심에 잠길 정도로 잔혹하고 엄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바른 권징에 대한 바울 사도의 훈계는 이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후 2:7-8).

경건한 양심은 목사든 일반 신자든 어떤 다른 사람의 무가치한 행동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거룩하고 올바른 사람에게는 성례들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덜 순수하거나 덜 유익하게 되지 않는다(4권 1장 19절). 더욱이 순수한 목회자와 교사들은 신자들에게 일생동안 악의 짐 아래서 신음하며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피난처로 삼도록 가르친다. 이 모든 교회의 거룩한 일들을 우리 신자들은 느슨하게 하거나 미온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부류에 대해서는 키프아리누스의 말대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을 여호와께, 여호와의 철장에 맡겨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4권 1장 19절).

교회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시온으로서 그가 영원히 쉬시는 곳이다(시 132:13-14). 여호와는 자신의 법도를 영원히 폐하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로 지키신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비록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의 약함으로 인해 수많은 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영원히 쉬시는 성전, 곧 교회 안에서 용서받고 위로받고 쉼을 얻어야 한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2:7).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와 쉼이 있기에 교회는 거룩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기에 교회는 거룩하다.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라”(욜 3:17).

거룩한 교회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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