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4) 최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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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4) 최후의 부활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5.2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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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신자들의 부활은 그들에게 장차 소유될 복락과 영광을 꿈꾸게 한다. 바울은 자신의 수고에 따른 특별한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8).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단 12:3) 것으로 믿었다.

신자들에게 부활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으로 가능하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죽은 뼈들을 살리셨다고 하였다(겔 37:1~10).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성경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고전 15:13~14) 모든 복음이 헛되고 그릇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야말로 부활이 없다면 그것을 믿으며 삶의 길을 걷는 신자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다. 신자들의 사귐 자체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를 기다리는 것인데(빌 3:20)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일체의 삶과 사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은 부정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그 실증자이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본성으로 자신의 삶의 여정을 십자가 위에서 마치셨다. 그 후 부활하시고 불멸성을 획득하셨다. 그의 부활은 여인들, 제자들, 빌라도와 군인들, 부활 후에 친히 만났던 제자들, 오백여 성도들 앞에서의 승천 등을 통해 실증적이고 체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이 사실은 뒤바뀔 수 없고 취소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부활하셨으며 영원히 계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의 부활이 신자들로부터 분리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데 그리스도를 우리로부터 분리해 낼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과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으로 인해 부활의 영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지체 각자에게 위치와 직분에 따라 다르게 충만하게 채워져 간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를 미래의 삶의 동료로 삼으셨다(3권 25장 3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의 또 다른 표본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셨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골 3:4)이시다. 이 동일한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 그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썩음이 없고 순전한 몸을 받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썩음이 없고 순전한 몸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와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부활의 측면에서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은 이 부활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활을 소망하거나 바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죽음을 모든 것의 한계선이자 자신의 멸망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3권 25장 5절). 그래서 부활을 꿈꿀 수 없다. 그들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라”(전 9:4)거나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라고 하면서 스스로 절망에 빠져 있다.

이 가련한 인생들에 대해 칼뱅은 사람의 관습적인 매장행위를 통해 영혼불멸의 실상을 깨우치려 하였다.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신성하고 불가침한 매장이 영원히 사는 것을 사람에게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3권 25장 5절). 매장 예식은 거룩한 믿음의 조상들에 의해서도 활발히 지켜졌으며 이방인들에게도 남겨져 있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예식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각자의 전통과 문화 양식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칼뱅은 부활이 없다면 왜 이런 매장의 관습이 지속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성경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 다 변화되리니”(고전 15:51).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소리가 죽은 자들에게 도달하면(고전 15:51~52) 썩지 아니할 것으로 깨어나고 … 갑작스런 변화로 동일한 영광에 이른다.

부활과 영생의 관점에서 천년왕국설은 부정되어야 한다. 칼뱅이 보기에 ‘천년’은 교회의 존속기간이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남아 있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권 25장 5절). 천년의 왕국이 인정된다면 그 자체로 영원한 생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분명한 것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복락이나 유기된 자들의 징벌이 모두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사실이다(마 25: 41, 46).

성경은 종종 몸을 집으로 비유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고 하였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 하늘에 있는 …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고 하였다.

성경은 또한 몸을 주님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3-14).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고전 6:15)이자 ‘성령의 전’(고전 6:19)이다. 따라서 몸의 부활은 영원한 몸으로, 주를 위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령의 전으로, 하나님의 의의 병기에 합당한 몸으로의 부활일 것이다.

특히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의 증언은 영혼의 불멸, 곧 불멸하는 영혼이기에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의인의 영들과” 함께 모였다는 가르침(히 12:33)은 우리가 믿음의 선조들과 함께 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한 것도 영혼 불멸을 증언한 것이다.

육체의 부활은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라는 말씀에 의해서 확실히 입증된다. 하지만 칼뱅은 몸의 부활을 새로운 몸으로서의 부활로는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녹여서 만들려고 네 가지 원소들로부터 새로운 물질을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불러내신다고 믿었다(3권 25장 7절). 그는 새로운 몸이 주어진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릴 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한 숙고 속에서는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에 주목할 것과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던 것을 상기시켰다.

지금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 하늘의 삶에 아무리 무가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부활을 막을 수 없다. 부활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후 4:11)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시에 그 외모가 어떠함은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아무리 율법과 말씀에 부족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셨으면 우리의 몸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썩어 죽어져야 할 육체에 나타나는 것이 핵심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하고 이 죽을 것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것으로 부활은 완결된다.

이 부활의 복락이 아브라함에게서는 상급으로 예표되고 있다. “아브라함아 … 나는 …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다윗에게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시니 … 내게 줄로 재어 준 지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시 15:5~6)라거나 “나는 …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등으로 암시되었다. 요한에게서는 “그가 나타나시면 …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요일 3:2)으로 서술되었다.

이상에서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이며 그리스도의 실증이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았음이 드러났다. 부활은 세상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하늘의 영광과 보화다. 부활의 영광과 보화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요한에게서 보여지듯이 서로에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영광과 보화가 지금 당장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 행복의 도래를 고대해야 하고 고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을 맺자.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신자로서 고상한 삶을 영유하게 하며, 어떠한 극한 고통의 현실과 절망 속에서도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게 한다. 부활의 영광과 부요함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삶 속에서 썩어질 것이나 죽어 없어질 것들을 추구하는 대신에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몸을 가꾸며,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채우게 한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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