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1) - 기도, 해야 할 이유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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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1) - 기도, 해야 할 이유와 방법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4.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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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알려진 사실은 사람이 모든 선한 것들로부터 결여되어 있고 도외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현 생활 속에서도 구원에 필요한 도움들도 많이 받아야 하는 데, 이런 도움들도 결여하고 있다. 이런 실상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선한 보화와 구원을 위한 부족한 것들을 도와줄 원천을 찾으려 한다면 그 첫째 조건이 자신 밖으로 뛰쳐나가서 그 외의 다른 곳에서 도움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3권 20장 1절 참조).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성도)의 비참한 불행 대신에 행복을 제공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거저 베푸신 그 모든 충만함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셔서(골 1:19, 요 1:16) 풍부한 샘에서 물을 얻듯이 우리가 마시도록 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우리가 배워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알고 있는 보화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복음이 꼭 집어 말하고 있고, 우리의 믿음이 주목하여 바라보고 있는 하늘 아버지께 있는 모든 보화들을 기도로 캐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데 굳이 우리(성도)들이 일일이 기도해서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모르는 소리다. 엘리야가 비를 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아합왕에게 비가 오리라고 예언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였다. 자신의 종을 일곱 번씩이나 보내서 비가 오는 지를 알아보게도 하였다. 왜인가. 그는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이 잠자거나 무기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을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가 기도하면 관용이 많으시며 주무시거나 게으름을 피우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훼방을 받으실 수 있다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한다. 이 역시 무지의 소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들을 가까이 하시는 분이시다(시 145:18).

일부 사람들은 주님이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사족과 같은 헛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벧전 3:12, 시 34:15).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더 잘 증명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신음을 기꺼이 들으려 하신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정말로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저장해 두신 저 하나님의 부요함에 가 닿을 수 있게 한다. 기도가 믿음의 부록인 것은 맞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갖 부요한 재화의 존재를 확신하며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하늘의 보화에 가 닿을 수는 없다. 이 믿음을 인하여 나오는 기도가 하나님 자신의 현존을 우리에게 드러내게 하여, 곧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온갖 재화를 실제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전하시어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그 소유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특별한 평화와 안식이 깊이 스며들어 오는 것이다.

칼뱅은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3권 20장 3절). 첫째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진지하고 뜨거운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만들 만한 어떤 욕정이나 어떤 소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마음으로 하는 참 감사를 통하여, 그리고 감사를 표하는 것을 통하여 그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가 간구한 것들을 취하게 되고, 그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더욱 뜨겁게 그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 가운데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것의 실행과 그것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연약함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확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성도)는 기도해야 한다. 고맙게도 칼뱅은 네 가지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 하나는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기에 우리(성도)가 그 대화의 수준에 필요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3권 20장 4절). 문병호 교수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로서 자기의 마음과 뜻을 넘어서는 성향을 품어야” 한다고 하였다(3권 20장, 4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우리가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과의 대화의 수준에 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믿음과 경건함을 높이자는 말이다. 방랑자인 우리의 마음이 세상 일로 인해 하늘로부터 끌려 내려와 땅에 고착되어 있는 채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사람이 맹목적인 이성이 고안해 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마음의 덧없는 척도에 갇혀서도 안 된다. 속마음과 열의를 기도에 바쳐야 하고 떠돌아다니는 생각들로 마음을 산만하게 흩어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밀한 담화를 허락하시는 데 속된 것들이나 허망한 것들을 거룩함에 섞는 식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기도할 때에 손을 드는 의식은 우리의 속마음을 높이 끌어올리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어서 바람직하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 25:1)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성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심에 맡겨야 한다.

두 번째 기도의 법은 우리(성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3권 20장 6절). 우리는 항상 간구할 때마다 진실로 자신의 빈곤을 의식해야 한다. 간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서 그것들을 얻고자 하는 그 진지한 정서를, 아니 불타는 정서를 기도 안에 담아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습관적인 의무로 하고 우리들의 빈곤에 대한 위안을 구하는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 성도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청인지 아닌지 등을 묵상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기도하려 해서도 안 된다. 만약에 우리가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라고 기도한다면 그에 대해 주리고 목말른 심정으로 간절하고 뜨겁게 해야 한다. 다윗의 말대로 고난이나 어려움이나 근심의 때는 “주를 만날 기회”(시 32:6)이니 더 큰 뜨거움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만이 기도할 수 있고 기도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의 빗장을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자.

세 번째 기도의 법은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주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간구하는 것이다(3권 20장 8절). 믿는 자들의 기도의 시작과 준비는 죄과에 대한 겸손하고 진실한 고백과 아울러 은총에 대한 기원이다(시 25:18). 성경은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성도가 기도할 마음을 갖게 되고, 기도함으로써 마음을 달래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기도이든 그것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 부드럽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하여 서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고상함을 주장하는 일체의 입장을 잘라내며 일체의 자기 확신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적극적인 면에서 성도(우리)의 기도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소유해서 누리고 있는 기도의 보배로움(가치)이다. 다윗이 “여호와여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시 86:2)라고 한 기도나 히스기야가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 20:3, 사 38:3)라고 한 기도가 그 증거다. ‘죄인’은 의에 대한 어떤 갈망도 없이 자기의 죄 가운데 머물다가 죽어가는 자이다. 하지만 경건한 성도들은 다윗이나 히스기야처럼 자신들을 적들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자기들의 의와 순진한 마음이 드러나면 여호와께서 헤아리시고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실 것이라 믿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 가슴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양심을 즐기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네 번째 기도의 법은 소망과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문병호 교수는 이를 회개의 쓰라림과 믿음의 달콤함을 버무려 소망 가운데 간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3권 20장 11절). 성도는 무엇을 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용기를 내서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기도에 대한 ‘확신’은 마음의 달콤함이나 완전한 쉼의 위로나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의 느낌 그 이상이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는 극도의 괴로움을 당하고 혼절할 정도가 될 때까지 감행해야 한다. 그때 믿음이 그 기도에 맞추어 적절하게 기도자 자신을 돕는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우연히 불쑥 터뜨리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앞서가는 믿음을 뒤따라야 한다.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성도의 기도에는 명령과 약속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찾으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 “하나님이여 ……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나이다”(시 65:1-2).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시 145:19). 이제 우리(성도)가 이 말씀들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함께 그의 본성(권능, 선하심, 약속 지키심 등)에 대한 묵상을 병행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라고 외쳤다. 요엘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라고 소리치며 증언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는 말씀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진정 우리가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때(벧전 5:7, 시 55:22)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실 때처럼 그 기도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피하지 않고, 그를 찾지도 않으며, 그의 도움을 탄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든 것이다. 담대한 기도의 영은 두려움, 경배, 간절함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 기도의 영,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배와 간절함의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신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의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비천함과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되 결코 실망치 말고 끝까지 그 비천함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탄원하면서 약속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명을 다하여 하늘나라의 온갖 보화를 캐내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선물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모든 성도들이여!! 그러므로 기도하자. 또 기도하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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