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3) 예정론 – 영원한 현재적 선택과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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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33) 예정론 – 영원한 현재적 선택과 유기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5.0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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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 전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하나님의 예정(豫定)은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영원한 선택과 영원한 유기에 관한 것이다. 영원한 선택과 유기이기에 그것은 동시에 현재적 사실이기도 하다.

본래 예정은 그렇게 대단한 말은 아니다. 사람이 날마다 하루를 사는 동안 미리 결정하지 않고 무턱대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게 사람은 날마다 나름의 예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도 무슨 행동이라도 할라치면 반드시 그 전에 어찌할지를 생각해 본다. 식물들도 자신이 양분을 잘 흡수하고 잘 자랄 수 있는 방향을 미리 찾아서 대비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사람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모든 존재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는 한 번 쯤 미리 헤아려보는 예정을 다반사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정이 예정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현재(의 사태)와 반드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예정은 현재 그대로 실천되고 있는 가 그렇지 않는 가에 따라 의의가 있고 없고 한다. 너무 자주 바뀌고 변경된다면 그것은 예정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게 예정을 해서 그대로 실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단한 것일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성경이 사람의 하는 일을 헛된 일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것과 다른 것은 우선 그것이 영원하다는 데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엡 1:4-5)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딤후 1:9)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홀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 지극히 높으신 자가 … 여호와의 백성은 자기 분깃이라”(신 32:8-9).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 ”(신 7:7-8). “…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 택하셨음이 …”(신 10:14-15).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시 105:5-6).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롬 9: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 예정의 핵심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하신 것이고 뜻으로 하신 것이고 은혜대로 하신 것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지(豫知, 미리 아시고)하시고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찌 될지를 미리 다 아시면서 예정을 하셨다면 그것은 예정이라 할 수 없다. 다 알고 있는 데 굳이 예정을 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하나님의 섭리 또는 속성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예정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지금도 앞으로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1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하나님이 단번에 홀로 영원히 예정하신 이유는 오직 자기 백성들 또는 자녀들을 사랑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겠다고 말만 하시고 그저 관망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예정을 거짓 없이 변함없이 순결하게 조성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신다. 실제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셔서 자녀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하시어 자신의 예정을 이루어내셨다(행 2:23). 하나님은 그렇게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조성자이시다(3권 22장 6절).

선택의 다른 한 편에는 유기(遺棄, 내다 버림)가 자리하고 있다. 선택만 있고 유기가 없다면 선택의 의미가 없어진다. 선택이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진 것처럼 유기 역시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졌다.

칼뱅은 하나님의 예정론(교리)을 탐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깊숙한 경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이 그의 값없는 자비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고도 하였다. 교회의 분명한 모습도 이 예정교리를 바르게 가르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3권 21장 1절 참조).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께 …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해 있다(신 29:29). 성경이 하나님의 예정을 밝히 드러냈다. 이제 그 예정이 우리의 일이 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예정, 곧 영원한 선택과 유기를 영원하면서도 현재적으로 실증해 가는 데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나)가 하나님의 예정을 실증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우리가 무조건 행복하고 평안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런데 야곱의 장자소유권은 미래의 세대와 관련된 것이었지 현실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현실은 수없이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 눈물 속의 도피, 슬픔, 쓰라린 근심들로 점철되었다. 가난안 땅 역시 하늘 처소의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었을 뿐 그 땅에서의 삶도 야곱에게는 역경의 연속이었다(3권 22장 6절 참조). 역으로 말하면 극심한 고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이고 반대로 평탄한 생활을 하면 택함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사람은 누구라도 함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내어 버렸다고 불만할 수 없다. 선택과 관련하여 불만을 제기하는 그 자체가 실은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불변하시며 진리이신 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느냐고 불만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구하고 있는 것이 된다. 불만의 제기는 그 사람 자신의 모순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 대신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순수한 선하심만을 헤아리며 그를 경배하는 일이다(3권 22장 9절 참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에 계시하지 않으셨으면 사람은 누구도 선택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당연히 사람은 누가 선택되고 유기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지레짐작으로 아무개 아무개가 선택되었을 것 같아 라고 추측하는 것은 말 그대로 추측이거나 억측이다. 선택과 유기의 실체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어서 예수님조차 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유기된 자라 하지 않으시고 ‘내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셨을 뿐이다. 선택하거나 내어버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예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하물며 무지한 사람에게 있어서이랴.

그렇다면 우리(나)가 우리 자신의 선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물론 우리가 아무리 확실하게 우리의 선택이 믿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울로 보듯이 희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우리(나)의 확신의 길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 한 길이다. 이 확신은 우리에게서 언제든 현재적이어야 한다. 이 조건은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동일하다.

유기 역시 영원하면서도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다. 유기 자체가 하나님의 비밀에 가려져 있기에 사람은 누구라도 유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유기로부터 벗어나는 길 역시 사람이 현재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믿으며 확신하는 것 외에 없다. 진정 선택이냐 유기냐의 문제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잠시도 쉴 수 없는 언제나 현재적으로 중차대하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느냐고 따지고 묻고 하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하여 뭣하나 보태거나 한 일이 도무지 없다. 사람이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사람은 선택과 유기 사이에서 생사를 오가느라 그렇게 한가하게 하나님께 따질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오직 경성하여 깨어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선택받았음)을 이루어 가는데 진력하는 일이다(빌 2:12).

사정이 이러한데도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이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른 뜻으로만 말미암기에 그것이 독재자의 육욕에 불과하다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3권 23장 2절). 진정 하나님의 뜻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뜻에 앞서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기에 영원히 정당하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필연성을 부과하셔서 그들이 불가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하셨다면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3권 23장 6절). 이 말도 억지다. 그들은 삶의 순간 마다 자신들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확인하는 일이 더 급하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를 사람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인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편향된 것이라고 떠들어 댄다(3권 23장 10절). 이 역시 무지의 소치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선택이 편향되었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알 도리가 없다. 이외에도 터무니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사람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열의를 앗아간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3권 23장 12절).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결단코 거룩한 삶에 이루고자 열의를 다하려 할 수밖에 없다. 택한 받은 사람은 경성하여 깨어 있는 자이다. 마지막으로 무조건적 선택 앞에는 모든 권고가 헛되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3권 23장 13절). 이 또한 사악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 전체와 유기된 사람 전체를 속속들이 밝혀내야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더 두려운 것은 누구라도 아무개 아무개가 선택받았고 아무개는 유기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권고는 적절하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고 전하는 이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 믿는 무지는 무모한 지식보다 낫다. 공로를 찾으라. 그리하면 그대는 오직 형벌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깊도다.”(3권 23장 5절).

신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이며”(시 15:1)라는 성경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여호와의 장막에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시 24:4)한 자가 들어간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시 24:6)들이 들어간다.

신자는 또한 겸손히 깨어 있어야 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신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런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삶으로 인해 의롭게 되었음을 잊고 산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일쑤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심금에 울려온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9-10),

참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 곧 선택과 유기는 우리의 칭의를 담보해주는 또 하나의 은혜의 원천이다. 이러한 은혜의 삶으로 안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권고가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이르렀다. … 그러므로 길에서 계속 행하자.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6:12) … 우리는 걸아가야 하고, 나아가야 하고, 자라가야 한다.”(3권 21장 2절).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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