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9) - 칭의에 관한 율법과 복음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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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9) - 칭의에 관한 율법과 복음의 조화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3.1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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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사탄은 자기 수하들(스콜라주의자들)을 활용해 왔다. 그들이 한사코 주장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선행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로 인해 사람이 칭의를 얻기 전에도, 칭의를 얻은 후에도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17장 1절).

그들은 율법이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이 율법에 근거해서 의롭게 되는 행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들이 내세우는 증거는 이렇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 7:5-7)

이 말씀들에 근거할 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면 율법 자체가 역할하는 것이 없으며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행함으로 인해 의롭게 되기에 믿음에 의한 의롭게 됨이 쓸모없게 될 것이다.

칼뱅은 이 말씀들의 핵심 교훈을 하나님께서 율법 안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신 11:26)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복과 저주는 아담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생명과 죽음이다. 율법의 이러한 역할에 대하여 칼뱅의 대처는 단호하다. 그는 율법이 우리에게 죄책을 일으켜 은총을 간구하도록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더더욱 결정적인 것은 율법을 통한 의롭게 됨이 무효한 것은 사람이 본성적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2권 7장, 3-5절).

율법이 우리에게 생명 혹은 죽음, 복 아니면 저주가 되고, 동시에 사람이 그것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이 사실인 한, 우리(사람)는 이미 죽음과 저주 아래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영원한 사태다. 이것이 사람의 영적 실재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이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뱅은 이러한 율법의 약속들이 무효화되는 길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돕기 위하여 보내주신 복음에서 찾았다. 복음의 도움이라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 데 모자라는 부분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분 안에서만 의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의 선포다(3권 17장 2절). 그 핵심적 정의는 바울의 공포 안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율법의 행위가 의롭게 됨의 보상이 될 턱이 없다. 율법의 행위는 우리의 의롭게 됨에 대해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율법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과 관련하여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에만 집중하게 되면 자칫 율법이 지니는 나름의 의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가 있다. 율법의 역할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윗의 기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2)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시 25:11)

시편 25편 2절과 8절의 기도 속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구원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이 두 말씀은 다윗 역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다음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와 ‘나의 죄악이 크오니’의 두 구절은 다윗이 자기의 잘못됨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이 잘못(죄악)의 해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알았을까.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와 그 의에 미지치 못했을 때 그것이 허물(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허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율법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율법을 지켰을 때 주어지는 상급이 그 안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성취의 몫으로 암시된다. 그 완성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써만 가능하다. 다윗이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해 달라고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완성임을 암시한다.

율법의 약속은 그것이 명령하는 것을 행하면 (당신에게)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3권 17장 6절). 이 보상 안에 복음의 약속이 담겨 있다. 복음의 약속은 율법의 행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과 맺은 자비의 언약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지키심에 따라 모든 불완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가려지고 그리스도의 순수함으로 정결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시 106:31).

이로써 칭의는 율법이 암시하지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우리의 불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임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낳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그 증거다(3권 17장 14절).

궤변론자들은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잠 20:7),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 “율례를 지키고 의를 행하면 의로운 삶을 산다”(겔 18:9, 21 ; 33:15) 등등의 말씀을 제시하면서 의롭게 된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완전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변한다. 과연 그런가. 실제로 그들이 제시한 말씀대로 완전하게 산 사람이 이었던 것인가. 성경의 증언대로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성도의 덕성을 완전하다고 부를 때, 이 완전함 자체에는 또한 진리 가운데서와 겸손 가운데서의 불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3권 17장 16절)고 주장한다.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의 선포에 관한 것이었다. 즉 “외관적인 믿음의 가면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써 의로운 자들은 자기들의 의를 순종과 선행으로서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행함 내지 선행은 의의 열매이지 의를 위한 조건이 아니다.

진실로 “만약 자비로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다면 ~ ”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여기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 ” 우리에게 면류관, 의, 영생 등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를 그의 관용이 숨기지 않았더라면 ~ ” 의의 전가는 있을 수 없다. “만약 그의 선하심에 의해 그들 안에 있는 형벌 받아 마땅한 것이 지워져 없어지지 않았다면 ~ ” 우리에게 어떠한 보상 역시 있을 수 없다(3권 18장 5절). 선행의 의란 오직 하나님이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그것을 인정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면 분명히 상급이 있다. 특히 그들이 환란을 겪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바울은 환난을 겪던 데살로니아 사람들에게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5)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행 14:22). 그는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고도 하였다(갈 6:17).

하나님이 신자들의 선행에 대해서 갚으시는 은총은 선행 이전에 베푸시는 은총과 다를 바 없이 그 원인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있을 뿐이다(3권 18장 2절). 그 행함의 은총조차 주님께서 신자들이 행위를 생각하기 전에 이미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의롭다 여김을 얻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믿음은 행위의 가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도구라는 말이다(3권 18장 8절). 예언, 방언, 통역, 지식 등의 모든 은사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것이 소망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 이 믿음과 소망을 지니고 살 때 반드시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이며 자연스러운 신자의 선행이다. 신자들이 사랑의 행위가 의의 열매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의 사랑의 행함은 결코 공로일 수 없으며 더더욱 보상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과 관련하여 율법이 하는 역할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 의를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함을 몽학선생으로써 가르쳐 주고 있음이 드러난다. 율법은 그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복음 곧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의를 만천하에 선포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확증한다. 이를 믿음으로써 신자는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에게서는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랑이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솟아나온다.

참 신자는 그 사랑을 좇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신자라도 이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 다만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 완전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허물이 있고, 부족함도 많다. 그러기에 신자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총을 좇아 사랑을 실천하며 선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 삶의 과정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신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 것이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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