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26) -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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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26) -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1.3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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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땅의 축복들(만물)을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느냐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성도는 이를 체계화된 삶의 방식으로 소홀함이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칼뱅은 필요에 따르든 즐거움을 위해서든 순수한 양심으로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균형의 삶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기독교강요, 3권 10장, 1절).

주님은 우리에게 순례자의 삶을 살 것을 교훈하셨다. 그것은 서둘러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삶이다. 역으로 말하면 성도는 세상의 것들을 하늘나라로 가는데 유익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성도가 모든 삶에서 오직 순례자에만 어울리도록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물을 주신 것이 오직 필요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서도 주셨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우리의 선을 위해서 주셨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이 필요를 따라 주신 것은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즐거움을 위해 주신 것은 즐거움을 따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웅장한 산, 맑은 물, 널따란 평원 등등은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즐기도록 주신 것이 분명하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들에 대해 정하신 목적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루어가는 삶도 순례자의 삶의 일부다. 성도는 기본적으로 만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사용하여 필요에 따라 동시에 즐거움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10장, 2절).

저 비인간적인 철학(특히 스콜라철학)은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서만 피조물을 사용해야 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열매들을 악의적으로 빼앗는다. 이런 식으로 철학은 사람의 모든 감각을 파괴하여 그(녀)를 하나의 벽돌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킨다(기독교강요 3권 10장 3절).

예컨대 잔치와 술을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지 못해서 자신을 어리석게 하고 탐닉하여 경건의 직무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욕망으로 불타올라 마음을 순결하지 못함으로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자신을 자랑해 대고,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함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아니 성도들조차도 자신들의 지각과 감각을 사치에 방치해버려서 그들의 마음이 죽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세속의 철학 사조를 좇고 물(物) 자체에 탐닉하고 하나님을 망각하는 삶의 양식은 하늘나라를 향하는 순례자의 삶을 버리게 한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 선물로 주신 것이다. 성도는 이 섭리를 좇아 살아야 한다. 즉, 자연만물과 일상의 일들 속에서 이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관용을 깨닫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롬 13:14).

많이 가진 성도는 세상의 물건을 열심히 애용하되 쓰지 않았던 것처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었던 것처럼 사는 것이 필요하다.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사지 않았을 상황에서 지내듯이 해야 한다(고전 7:29-31). 성도는 특히 많은 것을 누릴 때에 절도 있게 하여 자신의 풍부함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많이 가진 성도가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에 더 많이 몰두하면 할수록 그 만큼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많이 가진 성도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궁핍한 경우를 시절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부분을 모두 경계하면서 어떤 경우라도 순전하고 청결하게 사는 법과 평온하고 꿋꿋하게 궁핍을 참는 법을 두루 익혀 두어야 한다.

궁핍한 처지에 있는 성도는 그 처절한 부족함 속에서도 인내하며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배부름과 배고품, 풍부와 궁핍에 모두 처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였다(빌 4:12)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성도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위탁물이다. 사는 동안 이 위탁물을 사용했을 때 그 사용에 대한 결산의 때는 반드시 온다(기독교강요 3권 10장 5절).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눅 16:2) 성도는 이 셈을 피할 수 없다. 이 셈의 기준은 주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감당했느냐 못했느냐의 여부다.

주님께서는 쉼 없이 요동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을 부리는지를 아시며, 어느 한 편에 붙잡혀 있다가 단숨에 다른 반대의 것으로 바뀌는 천방지축의 마음을 아신다. 이 때문에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구별된 사명을 주시고 그에 따라 다양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하셔서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 각자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각각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을 마련해 주셔서 우리를 각자의 근거지에 배정하신 것이다(3권 10장 6절).

그래서 혹시 자기 사명에 모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성심성의껏 살아가려 한다. 예컨대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를 폭군의 통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모범적인 일로 삼는다. 하지만 이때 폭군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칼로 찌른다면 그런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다. 즉 사명에 따른 행동양식의 근거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균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의 소명이 일체의 올바른 삶의 기초이자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10장 6절). 누가 되었든지 주님의 소명에 순종한다면 그의 삶이 아무리 거칠고 천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면전에서 빛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의 지고한 가치는 반드시 헤아려지고야 만다.

칼뱅 당시의 시대는 16세기 후반기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산업사회가 시작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드러날 수 있었다. 직업의 종류나 삶의 형식이 오늘날처럼 복잡하거나 쉽사리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명을 따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모든 자연만물과 상황들을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 사용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늘의 시대는 칼뱅시대와는 너무도 다르다. 너무도 많은 사명이 있어 보이고, 그 사명을 따르는 삶의 형식이 너무도 다양하다. 물론 근본 조건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소명을 주시는 분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고 만물과 만사를 우리의 선을 위해서 주시는 이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도에게는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늘에 맞는 사명과 그 사명 실천을 위한 삶의 양식을 받으며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것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것은 청직이의 삶일 수 있고, 종의 삶일 수 있고, 달란트를 받은 삶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사명이든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직업이나 전문성, 또는 자기 자신의 재능 등등의 형식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사명을 아는 최고 최선의 방법은 믿음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우리(나)의 아버지로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우리(나)의 구속주로 아는 지식이다. 이 믿음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고 끝까지 견인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구속주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하게 하신다. 이 믿음으로 성도는 모든 일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사명인지를 확신하고 그 사명을 좇아 인내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삶은 순례자의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삶의 현장은 성도에게 그(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데 있어 주저주저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성도는 마치 야구선수가 타석에서 150Km 전후의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순간적으로 타격해야 하듯이 그렇게 긴장하고 집중해서 순간순간의 사명을 분별해 내어 실천해야 한다. 이 결정에서 가장 안전한 장치가 믿음이다. 이 믿음은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그리고 강하면 강할수록 유익하다. 확실하고 강한 믿음을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사모하는 데서 나온다.

성도가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활용해서 사명 완수를 해 갈 때 거기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 즉, 필요, 즐거움, 그리고 선이 있어야 한다. 오직 확실하고 강한 믿음으로 선택한 삶은 과정이야 어떻든 그 마지막 열매에는 필요를 따른 것이고 즐거움을 누린 것이며, 선을 이룬 것이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성도가 살아가야 할 순례자의 삶이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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