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3) -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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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3) -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2.12.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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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칼뱅은 회개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오는 그를 향한 참된 회심이라고 정의하였다(3권 3장 5절).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 합당한 회개를 하느냐의 여부는 사람의 평가를 넘어선다. 참 회개인가 아닌가는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회개를 어떻게 받으시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바른 삶을 위해서는 회개에 대하여 신학의 측면이나 신앙 실천의 측면에서 보다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탐색될 필요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태어났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유능력이나 양심 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유능력이나 양심 등이 사람을 동식물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은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의 학문에서도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사태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지혜와 섭리 안에서 서로서로 합력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선포한다. 창조의 시작부터 마치기까지의 사태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지음을 받아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마음(성향)은 자신에게 펼쳐지는 모든 사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은 서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특히 아담은 하나님을 믿어야 했고, 그리고 아내인 하와를 믿어야 했다. 성경이 증언하듯이 그는 하와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고 고백하며 믿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계속해 가기 위해서는 이 믿음이 변함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했고 그 결과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부부 사이의 불신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다시 부르심과 용서가 먼저였고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의 회개와 그 이후의 바른 삶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의 모든 사람들에게 결코 피할 수 없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타락한 사람은 완전한 믿음을 실천할 수가 없다. 사람은 불신을 일으켜 공동체를 해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에게는 이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자신의 불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불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칼뱅은 이 돌아섬과 관련해서 신학적으로 두 종류의 회개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율법적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 회개다(3권 3장 4절). 그가 말한 율법적 회개의 대표자들은 가인, 사울, 가룟 유다 등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회개한 것이었다. 이들의 회개가 율법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단지 보복자와 심판자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복음적 회개를 한 자들은 다윗, 니느웨 사람들, 히스기야 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였으며, 하나님을 은총을 베푸시는 분으로 믿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소망하기를 단념하지 않는 가운데 회개한 것이었다.

사람이 회개할 때 일곱 가지의 성향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칼뱅의 입장이다(3권 3장 15절). 첫 번째 성향은 열의(earnestness) 내지 간절함(carefulness)의 마음이다. 회개하는 사람이 이러한 열의와 간절함의 마음이 없다면 그 회개는 참일 수 없다. 둘째는 변명의 마음(excuse)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정화의 마음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셋째는 분함(indignation)의 마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신음해야 한다. 넷째는 두려움(fear)의 마음이다. 죄로 인해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로하심에 대한 우리의 동요된 마음가짐이다. 다섯째는 사모함(longing)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회개로 소환하는 것에 완전히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열정 있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여섯째는 열심(zeal)의 마음이다. 사모함에서 오는 자극들이 우리 안에서 활동할 때 열정의 마음이 분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징벌(avenging)이다.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렇게 징벌 받을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회개의 표징은 그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들, 그리고 이 세상 삶 전체 가운데서의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나타난다(3권 3장 16절). 하나님의 법을 규범으로 삼아 자기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 더 많은 열의를 쏟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회개에 대한 더욱 확실한 표징들을 보여줄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을 두려워하되 그 징벌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하게 사는 삶의 전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 그의 삶의 (세속과 구별되는) 거룩함과 순수함 등등이 참 회개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삶은 성도가 살아 있는 동안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이 열매가 견실하고 아름다울수록 그 사람의 회개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회개는 단순히 우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랜 시간 회개하는 것, 또는 작은 죄과로부터 큰 죄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 등과도 그다지 상관이 없다. 금식하는 것과도 별 관계가 없다. 회개의 본질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찢는 것이며 동시에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도는 자신의 지난날의 죄악을 증오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죄를 지으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회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공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으려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3권 3장 20절).

성도가 이 길을 따라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악과 싸워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성도의 육체가 확실하게 죽을 때까지,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다스릴 때까지 그 육체를 죽이는 항구적인 열심과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회개에 따른) 금식은 성도가 일생동안 검소함과 술에 취하지 않는 절도를 보이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회개는 사람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모르면 참되게 일어날 수 없는 사태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은혜 베푸시는 분으로 알지 못하고 오직 죄에 대하여 형벌을 내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하는 회개하는 것은 율법적 회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본성적으로 완전한 믿음으로 믿으며 실천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떤 규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지키면서 자신의 의를 정당화해 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회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패망을 불러올 뿐이다. 이에 반해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조건 없이) 구속의 언약을 주셨고, 그리스도를 구속의 성취자로 주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하게 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한다.

회개는 또한 사람이 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찢고(욜 2:13), 외적으로는 육체를 길들이기 위한 처방으로서의 훈련이라는 의의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도 회개를 강요할 수 없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회개를 강요할 선함이나 위엄이 없다. 그러나 회개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에 주위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절대성을 깨우치고 권면해야 한다.

한편 회개가 육체를 길들이기 위한 훈련으로 아무리 유익하다 하더라도 육체적 훈육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의 회개에 대해 과도하게 찬사를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회개는 일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스콜라주의자들(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대가 갚음)은 이단의 사술이다(3권 4장 1절 및 전장의 내용 참조). 사람의 마음의 통회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눈물이 그의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기에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자비함에 의해서 일뿐이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그것을 사제 앞에서만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알아서 일일이 고백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레위지파가 제사장이 된 것은 백성들의 죄를 듣고 용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그를 풀어주라고 한 것은 나사로가 죄 때문에 죽었으나 용서하시고 생명을 그에게 주시며 자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죄의 고백은 사람에 대해서 서로 그러한 죄를 짓지 말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함이었으며,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사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위의 보속은 더더욱 문제가 크다. 회개로 인한 죄의 용서는 곧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무름으로만 성취된다(3권 4장 26절). 도대체 하나님과의 화목에 사람의 행위가 끼어 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콜라주의자들이 말하는 행위의 보속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적하고 있다.

성도의 회개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래서 믿음의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없어서다. 우리의 회개는 개인적일 수도 있고 공개적이거나 공통적일 수 있다. 그것은 드러내어 고백할 때도 있고 마음속으로 애통하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회개를 가로막을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회개는 누구라도 어디서든 언제든 할 수 있는 사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회개를 명령하고 있음에랴.

성도여! 이제 우리는 회개가 종국에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고 있으며 우리의 형제들과 화목하여 산다면 그 삶 자체 안에 우리의 모든 죄악 된 마음씀씀이와 행동들의 통회와 용서가 다 녹아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회개를 위해 우리의 강제나 강요가 필요한가. 그것은 은혜 안에서 은혜로 이어지는 성도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다. 성도는 회개를 즐겨하면서 자신의 일상이 만들어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우리의 회개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그분을 사랑하고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화목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써 우리의 회개를 넘어설 수 있다. 성도가 살아 있는 동안 끝없는 회개를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넘어서고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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