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8) - 칭의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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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8) - 칭의의 목적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2.2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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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 ( 전 백석대 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칭의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늘 심판자가 부르셔서 전말을 추궁하시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와 연관이 있다(기독교강요 3권 12장 1절). 이와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는 말씀이다.

첫 번째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의지에 따라서 심문을 받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다. 두 번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헛된 확신에 속아 하나님의 심문을 무시하거나 그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먼저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잠 16:2). 이 양심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좌 앞으로 소환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역량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만큼 된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무능함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우리의 마음이 어찌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가식 없이 하나님께 복종당해야 한다(3권 12장 6절).

그리스도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러(사 61:1)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교만과 자만을 내려놓고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통회의 마음으로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입게 된다.

칭의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리게 하려는 데 있다(기독교강요 3권 13장 1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하게 하려는 데 있다. 성경은 칭의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따라서 칭의의 과정에서 자신의 어떤 무엇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고 그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행위나 율법의 준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성취될 뿐이다. 이 언약을 믿는 것, 곧 그 언약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자기 의지를 버린 것이 된다. 칭의는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라도 자랑할 수 없다(엡 2:8-9).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의 행위로 한 것이 아니었다.

행위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인과들에 비추어 보더라도 전혀 관계가 없다(기독교강요 3권 14장 17절). 구원의 첫 번째 인과는 효과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 그것이다(롬 3:23-24). 두 번째는 질료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얻을 뿐이다(롬 3:24). 세 번째는 형상인 혹은 도구인이다.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3:25). 마지막으로 구원의 목적인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증거와 선하심을 찬양하기 위함이다(롬 3:26). 따라서 이 모든 구원의 인과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기독교강요 3권 15장 7절), 사람에게서는 전혀 나올 수 없는 조건들이다

칭의가 성도에 대하여 지니는 의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를 향한 권고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요일 3:9)한다는 것과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 된다는 것이다(딤후 2:21).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한 위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8-10). “사망이나 생명이나……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우리를……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29)

그렇다고 칼뱅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서 사람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행위는 스콜라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행위는 공로(merit)가 아니라 선행(good works)이다. 성도의 선행은 그(그녀)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오며 자신의 교만과 자만을 하나님께 내던지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이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영접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동시에 이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의 행위가 성도의 선행이다.

애시 당초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에 맞게 율법 완수를 통한 의의 성취는 불가능하다. 성도의 행위 안에 구원을 이룰 공적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대로 “사람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선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님으로부터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기 안에서 칭찬을 받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기독교강요 3권 15장 2절). 더욱이 성경이 가르치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오직 그리스도와의 교통함에. 오직 믿음에로 한정된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있어서 사람의 행위가 단독으로 설 자리는 없다(3권 15장 1절).

하지만 성도의 선행은 부르심의 열매로써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즉 성도의 행위(선행)가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로서의 중생의 열매로 맺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의 과정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다. 성도의 선행이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칭의된 이후,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3권 14장 19절).

이상에서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공로가 아니라 선행이 요구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취해야 할 최초의 선행은 하나님의 심판좌를 마음속에 의식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 후에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면되고 의롭다함을 입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는 우리(성도)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요일 4:11).

성도가 선행을 했다면 그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성도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능이요 은사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성도)의 행위를 모두 전적으로 ‘우리것,’ 곧 우리 자신이 한 것이라고 인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약한 선행을 보시고서도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주신다. 그리스도 역시 그 자신이 우리에게 부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을 ‘우리것’이라 부르시고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하신다. 성도의 선행은 그것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 그 자체로부터 나온 (특정한) 가치가 그것에 매겨지고 있다.(3권 15장 3절).

그래서 더더욱 성도는 선행을 해야 한다. 그 선행의 출발은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믿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고 전하고 찬양하는 등의 성도로서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일체의 행위와 삶 근저에 자리하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최고의 선행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굳세고 강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인내와 연단을 더하면서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으로까지 자라가는 것 그것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최고의 선행이다. 이 선행은 모든 생활과 삶의 전선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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