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4) 스콜라주의의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에 관한 교리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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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4) 스콜라주의의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에 관한 교리 비판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1.0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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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 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이 주제는 칼뱅주의의 핵심교리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깨우치심에 의해 진리를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칼뱅주의자들에게는 말씀의 진리성과 관련하여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무엇보다도 스콜라주의자들(로마가톨릭교회주의자들)의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의 교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순전한 성도들을 겁박하였고, 그들을 암흑과 무지의 삶으로 몰아넣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이 교리의 폐해는 밝혀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과물들은 오늘의 이단교리나 진리의 말씀의 왜곡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도 유익을 줄 수 있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의 보속을 위해 마음의 통회, 입으로의 고백, 그리고 행위 등을 통해 죄의 값을 물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들었다(3권 5장 1절). 그리고는 자신들이 이 보속의 과정을 통제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거룩한 사도들의 공로, 그리고 순교자들의 공로를 모아서 이를 ‘교회의 보화’(the treasures of the Church)라고 하였다. 이 보화가 로마 주교(the Roman Bishop)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죄의 사면을 위한 이 필수불가결의 축복들(자칭)을 그 자신들에게 속하게 만들었다. 로마 주교는 자기 자신이 이 보화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능력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3권 5장 2절 참조). 실제로 교황에게는 성도의 죄를 완전히 사면하거나 몇 년 동안 사면할 수 있는 등의 권한이 있었었다. 추기경은 100일 정도를 사면할 수 있었고, 주교들은 40일을 사면할 수 있었다(3권 5장 2절).

스콜라주의자들은 성도(우리)가 첫 번째로 죄 사함을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만, 만약 다시 타락하게 되면 우리의 행위가 합력할 때에만 두 번째 은총이 획득될 수 있다는 논리를 세워두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그들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먼저 구속주 그리스도의 속죄함을 일회적인 것으로 평가 절하한 것이었다(4장 27절).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 대신에 이들 면죄부 장사치들은 “순교자들은 자기들의 죽음으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바쳤으며 더 많은 공로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쳐서 흘러들어갈 아주 많은 공로가 여분으로 있었다. 이 대단한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은 자기들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에 섞는다. 이 두 피로부터 죄의 용서와 보속을 위한 교회의 보고가 만들어진다”(3권 5장 3절)는 거짓 교리를 세웠다. 여기에 덧붙여서 “죄의 용서와 화목은 우리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받아들여지면 모두에게 일어난다. 세례 이후에는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교회의 열쇠를 통해 분배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술의 말들을 떠들어댔다(3장 4권 26절).

이들은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고 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왜곡하였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구속이나 구속의 무름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갈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해 고난을 받겠다는 자기 헌신의 고백을 한 것이었다.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순교자의 피도 타인의 죄 사함을 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의 피)도 속죄의 능력이 없다.

스콜라주의자들은 보속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의 주장 이전에 보속이 있었다. 그 보속은 하나님께로 돌려지는 보상으로써가 아니라 출교를 당하는 징벌을 받았던 사람이 다시 성도의 교제에 들어오려 할 때 그 자신의 회개가 더욱 공적인 것이 되도록 하고자 해서 요구된 것이었다. 모종의 금식이나 다른 의무들이 보속에 첨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콜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항들을 첨가하여 보속 자체를 성도가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거짓 위세와 돈벌이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보속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면죄부 교리는 스콜라주의자들이 보속의 교리를 강화하면서 성도들이 보속의 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 입의 고백으로 속죄되는 경우 고백자는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일일이 들어 말해야만 논리적으로 보속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죄를 다 아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다. 행함의 보속에서도 그 끝을 도저히 가늠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콜라주의자들은 무제한으로 줄기차게 보속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겁박들을 성도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들이 면죄부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분히 스콜라주의자들이 세속의 국왕들이나 영주들, 그리고 일반인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 장사였다.

연옥의 거짓 교리는 두 가지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감소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번에 완전한 것이 되는 순간 그들의 보속논리와 면죄부의 논리가 온전히 무효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단번에 완전히 되지 않고 처음에만 은혜로 되는 것으로 호도한 것이다. 그래야만 여분의 보속의 행위가 계속해서 끝없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보속교리의 해괴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일종의 관습이기도 하였다.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심지어 죽은 사람들의 빚을 갚아 해방시켜 주는 장례의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자들에 대해 일정한 형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러한 관습들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스콜라주의자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장례식이나 제사를 돌보는 것에 부지런함을 다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렇게 할 때 교황(권)이 죽은 자들을 돕는 거룩한 행위를 하는 자로 꾸며질 수 있기 때문이다(3권 5장 10절).

연옥설은 스콜라주의자들이 정경으로 여기는 마카비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10)라는 말씀을 왜곡하여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을 “연옥에 있”는 것으로 고안해 내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 명백한 진리의 말씀을 스콜라주의자들, 곧 면죄부 장사치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연옥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들은 연옥에는 불이 있어서 죄인들을 불로 태운다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3, 15)는 말씀 중에 있는 ‘불’을 자의적으로 ‘연옥의 불’로 왜곡하였다. 이는 진정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적인 억지 해석이다. 본문의 불은 나무나 풀, 짚 등이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타버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것, 예컨대 사람의 모든 발명품 등이 성령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다 타버려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뜻한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공적은 다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성령의 불에 의해 태워질 뿐이다. 성령의 불 가운데서 인간의 발명품들은 공적을 잃는다. 이 불타는 성령의 불 가운데서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핵심이다(3권 5장 9절 참조).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의 교리와 관련하여 스콜라주의자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였다. 칼뱅에 따르면 우리의 하나님은 징계의 하나님이시지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3권 4장 32~33절 참조).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그의 사랑에 대한 증명이다. 욥의 증언이 이를 증명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욥 5:17). 유기된 자들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맞게 될 때는 이미 그의 심판에 따라 형벌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매를 통하여 회개에 이를 뿐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다윗의 고백 역시 우리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증언한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결론적으로 말해서 스콜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심판자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부정했던 것이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자 교리다. 그리고 이 의롭게 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먼저여서 가능하다. 하지만 죄사함에 있어서는 죄사함을 먼저 받아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3권 4장 37절). 누가복음에는 “ …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7:36~50)은 여인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그녀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눅 7:50)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을 수 있었던 것은 죄 사함을 받은 후의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늘날의 성도는 스콜라주의자들(로마가톨릭주의)의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의 교리를 유익하게 참고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스콜라주의자들이 자세히 밝혀 주었듯이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기가 그렇게도 어렵고 험한 고난의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셔서 단 번에 완전히 영원히 우리의 죄를 없이 해 주셨음을 오늘의 성도는 감사하며 감격해야 하는 것이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지금도 죄의 사함을 위해 사제에게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성도는 편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기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누가복음의 여인처럼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그의 품에 안겨야 한다. 모든 성도가 이렇게 살아갈 때 스콜라주의자들의 보속과 면죄부와 연옥의 교리는 말살되고 마는 것이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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