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5) - 그리스도인의 삶
상태바
[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25) - 그리스도인의 삶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1.16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중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성도)이 하나님의 의와 일치하여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그들의 복종 사이의 균형과 일치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을 확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서술이 필요하다. 칼뱅은 경건한 성도가 자신의 삶의 틀을 바르게 형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규범화하게 하는 어떤 보편적 규율(some universal rule)을 제시하였다(기독교강요, 3-6-1). 그 대강은 철학자들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도덕을 적절하고 규모 있게 준수하도록 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그에게 맞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엡 4:22, 24)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이 우리의 온 영혼을 휘감아 마음의 정서 속에 스며들고 영혼에 자리 잡혀져야 한다(기독교강요 3-6-4).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삶의 세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함과 의를 추구하는 영혼의 내적 정서와 순전함을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순직함과 단순함으로 우리의 목표(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갈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랑도 방임도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시도하며 목표를 향해 전진해가는 삶이다(기독교강요, 3-6-5 참조). 비록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 완전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살고자 하는 한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이 성도가 마지막 날에는 선함 자체에 이른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지닌 직무가 있다. 그것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롬 12:1)다. 이를 위해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고한다.

세상의 철학은 그리스도인조차도 그들의 삶을 이성에 맡기도록 요구하며 유혹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철학이나 세속의 재물과 명예 등에 이성을 내 맡기는 한 그리스도의 삶을 모형으로 삼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께 자신의 이성을 맡겨야 한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두 형식의 삶의 밑바탕에는 전 생애를 통해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려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부정이라고 할 때 성도가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자신을 죽이기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부정은 오히려 성도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어떤 것은 적극적으로 취하고 어떤 것은 즉각 버리는 실천행위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디도서 2:12-14).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라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시는 가운데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도록 명하셨으며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실천하는 것이 또한 자기 부정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정의 결정적 요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재화의 검소한 사용과 궁핍을 견디는 절제와 각자에게 속한 것이 각자에게 돌아가게 하는 의로움, 그리고 세상의 불의로부터 멀어지는 경건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세속의 욕정과 불경건과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것도 자기 부정이다(기독교 강요, 3-7-3).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아부하면서 그 가슴속에 일종의 왕국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은 또한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거만하게 내세우려 한다. 다른 사람의 재능과 삶의 습관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부어대면서 그 일을 즐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마음과 태도들을 경계하고 자신에게서 반드시 없애야 한다. ‘분쟁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등을 자신에게서 뽑아내야 한다. 그 대신에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허물을 덮어주는 이유는 그 성도가 허물을 지닌 채로 교만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허물 있는 사람일지라도 인애와 경의로 가꾸어가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기독교강요, 3-7-5 참조). 요약하면 복음에 따라 없애거나 취하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이다.

칼뱅의 시대 역시 참담한 시대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남을 도울 때 그 사람을 면전에서 모욕을 퍼부어대지 않고서는 구제를 하는 않았다(3-7-6).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가난, 낮은 지체, 비천함에 대해 경이로울 만큼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이로울 정도로 증오를 퍼붓고 있었다(이상 3-7-8 참조). 칼뱅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은총만을 생각하라고 권고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총만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 부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몸조차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은 결코 자신의 것을 내어놓은 것이 아니다. 혹시 자기 것을 내놓아 그리스도를 부요하게 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것은 불순함 그 자체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은 주님의 축복이자 하나님의 손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알고 감사해야 할 뿐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또 하나의 방식이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경건한 성도(의 마음)가 항상 그리스도가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신 곳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다(마 16:24). 세상은 어렵고, 고생되고, 불안하고, 수많은 악으로 채워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맏아들 그리스도를 이곳에 살게 하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온전히 담당하셨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게 될 때 오는 유익함이 있다. 하나는 그것이 우리를 연단시킨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육체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남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며 교만해진다. 이 교만을 하나님은 질병, 사랑하는 가족의 잃음, 불명예에 빠짐 등등의 자기 십자가 짐을 통해서 우리를 꺾으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 다윗의 고백은 이러한 사실을 통렬하게 증언한다. “ …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의 두 번째 유익함은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허세를 부리는 우리의 거짓된 억측을 뒤집고, 유희로 일삼는 위선의 가면을 벗기며, 육체에 대한 위험한 과신을 부수고, 겸손히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게 하고, 우리의 소망을 견고하게 한다(기독교강요, 3-8-3).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배워간다. 이 배움이 순종이다. 그리고 순종의 거듭된 훈련이 마침내 하나님을 소망하게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세 번째 유익은 영광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성경이 성도에게 주는 위로는 그(녀)가 슬픔과 번민의 상처를 안고서도 하나님의 영적 위로에 의존할 때 즐거움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 분명 욕됨의 길이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영광의 길임이 분명하다(고후 6:8). 칼뱅은 성경에서 칭찬 받는 사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악한 일로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겪어도 부서지거나 넘어지지 않고, 칼에 찔리는 수난을 당하여도 그 순간 영적인 기쁨으로 충만하고, 근심에 짓눌려도 하나님의 위로로 되살아나 다시금 새 숨을 내쉬는” 사람이다(기독교강요 3-8-10).

칼뱅이 제안하는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삶의 형식은 미래의 삶의 소망 내지 죽음 이후의 즐거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삶의 모욕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성도는 거기서부터 일어서서 영원한 미래의 삶을 묵상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기독교강요, 3-9-1). 우리의 의무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을 조롱거리로 여기며, 마음을 다하여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을 힘쓰는 데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 있고, 그리하여 최후의 부활의 날을 즐겁게 사모해야 한다. 성도의 현재의 삶과 내세의 삶의 길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를 빛나게 해야 한다.

이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선은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여 그 의에 일치하여 살아가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실천의 삶은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이고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는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사탄의 권세 아래서 타락과 사악함과 질병과 온갖 추악함 등으로 꽉 차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과 고통의 삶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베푸시는 사랑의 연단으로 받아들인다. 또 하나는 죽음조차 기꺼이 맞이할 줄 알고, 동시에 그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까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형을 이룬다.

참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가 빛날 수 있도록 살아가도록 하자. 그 빛냄이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멈춤이나 주저함이 없이 전진 또 전진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비추이게 하자. 비록 실패와 절망을 맛보는 중에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활을 소망하며 살아가자.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가 빛나고 있다고 믿는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