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30) 그리스도인의 자유 – 칭의의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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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독교강요 둘러보기(30) 그리스도인의 자유 – 칭의의 부록
  • 문노사 목사
  • 승인 2023.03.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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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칼뱅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칭의의 부록으로서 그것의 능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가 칭의를 먼저 소개한 후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순서를 따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칭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해야 만 소위 자유라는 말이 그(녀)에게 온갖 욕망의 발산을 허용하지 않는 것임을 명확히 알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 자유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순종의 굴레를 벗어지게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없다면 그리스도도, 복음의 진리도, 영혼의 내적 평화도 올바르게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1절).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율법을 넘어서야 하며 율법에 의해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어느 누구도 자유로운 상태로 놓아두지를 않는다. 그래서 칭의를 소망하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의 핵심은 율법이 주관하는 일체의 행위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는 데 있다. 그 출발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의 물음에서가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의 물음에서 비롯된다(3권 19장 2절).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준수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포하였다(살전 4:7, 엡 1:4). 이 전제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율법(의 행함이나 준수 포함)이 아니라 경건(거룩함)의 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건의 훈련은 율법의 모든 완전함을 능가하시는 한 분 그리스도의 의와 연결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되는 것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율법의 의식과 저주로부터의 자유까지를 포함한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 실제 사례가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 폐지된 율법의 옛 그림자를 다시금 교회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짓사도들과 맞서고 있던 바울 사도의 행적에서 확인된다. 그는 거짓사도들이 교회에 할례를 행하는 의식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2-4). 그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5-6)라고 증언하면서 율법의 의식 대신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일진대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쉼을 누리는 그 자체가 그들의 자유다. 그리스도인들이 할례의 저주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다.

칼뱅이 말하는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자유다(3권 19장 4절). 본래 율법의 규범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신 6:5). 이렇게 하려면 우리의 영혼은 다른 모든 지각과 생각을 없애고 마음의 욕정도 지워내야 한다. 우리의 온 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집되고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욕정이 있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약화시키며 그것의 욕망을 좇게 한다. 우리는 율법의 준수에 있어서 참으로 무능하다. 이러한 행위의 불완전함이 곧 율법 위반이다. 이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의식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증거다.

그런데 칭의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쉼을 얻었기에 이미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자녀들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막 시작된 일, 절반만 이루어진 일, 심지어 약하게 여겨지는 일조차도 주저 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며 또한 드리려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는 행함이 이제 겨우 시작 단계라 하더라도 그 행함의 완전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율법의 의식과 저주에 매임이 없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성을 드린다. 그것이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예배를 받고 계신다고 생각지 않으신다. 그래서 칭의 곧 믿음에 의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결정적 요소다. 칭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녀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서 자신들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당연히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다.

이 자유의 특성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정욕으로 가득 찬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들 속에 의가 살아 있다거나 하는 데 대해 아직 완전한 확신이 없는 것과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미 율법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이 그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3권 19장 6절). 이런 의미에서 칭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아이처럼 미숙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지닌 자들인 것이다.

칼뱅이 말하는 세 번째 자유는 구원과 무관한 ‘중립적인 것들’(ἀδιάϕοροι, things indifferent)에 있어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이다(3권 19장 7절). ‘중립적인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으로 매이지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먹지 않을 자유, 옷을 입고 벗을 자유, 휴일을 즐길 자유와 즐기지 않을 자유 등등이다. 만약에 맛있는 음식이나 비싼 음식이 불법으로 보일 경우, 값싼 빵을 먹을 것인가 보통의 음식을 먹을 것인가 등으로 깊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 앞에서 평화로운 식탁을 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논쟁들은 한 번 시작되기만 하면 가볍게 끝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예를 들면 음주문제나 다양한 직업 종류의 선택, 골프 등의 스포츠와 관련된 문제 등등). 그래서 중립적인 것들에 대한 자유를 올바르게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중립적인 것들이라 하더라도 이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이에 대한 자유의 행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주어진 용도대로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영혼의 동요 없이 사용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유일 때만 그 자유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의) 양심을 평온하게 진정시킬 수 있다(3권 19장 9절). 즉 어떠한 중립적인 것들에 대해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누리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어울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자들이다. 이 자유가 반드시 선포되고 누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 자유가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시험에 들게 할 정도로까지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것들에 대해 자유하게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이 모두 중요한 이유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실천의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바울 사도는 자유 안에서 디모데에게는 (동일한) 할례를 베풀라고 했고(고전 9:19-22), 역시 자유 안에서 디도에게는 (동일한) 할례를 베풀지 말라고 할 수 있었다(갈 2:3-5). 그가 이렇게 자유롭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경우든 그것이 구원과 복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중립적인 것들에 대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의 열심을 다하는 것이자, 이웃을 위하여 덕을 세우려는 마음 쏟음의 표출이어야 함이 드러난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믿음의 순수함 아래서 준행되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과 세상의 권세와 법에 얽매이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혼을 사람들에게 종속시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게 된다(갈 2:21). 우리 안에는 영적인 자유와 거듭난 양심의 법정이 존재하고 있다(3권 19장 15절). 우리의 현실의 삶은 영적 통치(spiritual government)와 정치적 통치(political government, 세속적 통치) 둘 다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자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자로써 그리스도인은 내적인 영혼의 갈구함이나 외적인 정치적 갈망 사이에서 마땅히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을 위해서 바르게 처리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양심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을 갖게 하여 우리의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한 양심으로써 오직 거짓 없는 하나님에 대한 선한 믿음과 함께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 곧 마음의 내적 순전함(딤전 1:19)으로 살아가려 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칭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식과 저주로부터 벗어나난 자유인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자유를 지녔다. 어린 아이처럼 미숙한 순종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염려 없이 하나님을 마음껏 믿으며 예배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중립적인 것들로부터도 자유를 누린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양심의 저주를 잘 다스리면서 모든 주어진 것들을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유 안에서 사용하고 누린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이여! 우리가 율법과 율법의 의식들의 매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자유를 맘껏 누리면서 일체의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선물에 합당하게 즐기며 사용하는데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존재로 살아가자(히 11:38).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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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2023-03-27 10:52:47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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