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7) - 유아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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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7) - 유아세례
  • 문노사목사
  • 승인 2023.09.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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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논설위원)

칼뱅은 유아세례에 대해 논해야 하는 이유를 어떤 광란의 영들이 유아세례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평화와 교리를 순수함을 위한 것(부록)으로 들었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결코 결여되어 있지 않은 어떤 하나님의 규례(유아세례 포함)도 폐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4권 16장 1절).

유아세례의 의의는 세례의 비밀을 밝히는 가운데서 드러난다. 세례는 이미 앞 장(기독교강요 둘러보기46)에서 살펴보았듯이 씻음의 증표이고 우리 원죄의 죽임과 원죄의 여파로 오는 우리 죄에 대한 죽임의 증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며 중생하여 새로운 삶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체를 이루게 한다(4권 16장 2절 적용). 유아세례 역시 유아에게 이와 동일한 작용을 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께 접근하는, 곧 불멸하는 삶에 들어가는 첫 번째 통로는 죄사함이다. 죄사함은 깨끗함을 받는 세례의 약속에 부합한다(4권 16장 3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말씀하셨는데 완전하게 행하는 것은 죄사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죽음 다시 말하면 중생으로만 가능하다. 그 증표가 할례였다.

주지하다시피 할례는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아야 하는 성례다. 사람이 아담으로 대표되듯이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의 할례 받는 것으로 대표되었다. 모세는 할례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위하여 마음의 포피를 베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신 10:16). 그는 이 할례를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신 30:6).

그리스도는 세례의 근본으로서 그 안에 죄사함과 육체의 죽임이 거한다. 그 죄사함과 육체의 죽임이 있는 한 그리스도는 세례의 근본이시자 할례의 근본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 안 있어 죽었기에 ‘복’이 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되신 분이시자 모든 족속에 대한 복이 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였다(4권 16장 3절). 그러므로 할례의 표증은 그리스도의 복되시는 은혜를 인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의 근본이시자 할례의 근본이신 것이다.

세례와 할례에는 서로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 유사점은 두 성례가 약속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 죄사함, 영생이라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표증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두 성례의 본체가 모두 중생을 뜻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기도 하다. 세례든 할례든 각각의 본체의 완성이 하나의 근본 즉, 그리스도에 의지한다는 것도 유사점이다. 그러므로 할례와 세례는 내적인 비밀에 있어서 서로 차이점은 없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란 단지 외적으로 의식이 다를 뿐이다(4권 16장 4절 적용).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교회로 들어가는 첫 번째 통로였다. 할례는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가족과 백성으로 삼으셨음을 한층 더 확신하게 하는 표였다. 그것은 동시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고백하는 표였다. 이와 똑같이 오늘날의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그의 백성으로 여겨지며, 그에 따라 그의 이름에 맹세하게 된다. 세례가 할례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할례와 동일한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4권 16장 4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다(창 17:12). 이스라엘 집에서 난 자이든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이든지 모든 남자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는데(창 17:13), 이 할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할례 받은 자들의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었던 것이다(창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 되기에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어졌다(창 17:15).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미래 약속을 인치는 인장이었다(4권 16장 5절 적용).

하나님의 이 언약은 당연히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에게 구약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아버지의 은혜가 감해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대인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들이 되어 거룩한 씨라 인정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아이들도 거룩하다고 여겨져야 한다. 이 언약이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례로 대체되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한 선하심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고 후하게 땅 위에,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는 것이다(4권 16장 6절 적용).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린 아이들을 안으신 것이 세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뱅은 그들과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어린 아이들이 자기에게 나오게 하라고 하시면서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천국의 상속자라면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에 가입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보았다.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사귐의 증표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맞이하시고 안으시고 축복하신 것은 그 자체로 세례의 본질을 드러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아)세례가 그리스도가 맞이하시고 안으시고 축복하신 것보다 더 값진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고까지 하였다(4권 16장 7절 적용). 현실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지금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린아이는 ‘브레페(βρέφη)’(눅 18:15) ‘파이디아(παιδία)’(마 19:14)로써 ‘어미의 젖을 먹는 아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은 가까이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 19:14)라는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어린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주님께로 나올 만큼 된 아이들을 가리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헬라어의 용어 상 어린아이는 어미의 젖을 먹는 아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라고 할 때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들 자신들과 그들과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4권 16장 7절).

물론 복음서 기자들이 유아세례 실제를 단 한 번도 자세히 기록해 두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있다. 그렇다면 가족 안에 유아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유추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사도 시대에 여자들이 성찬에 참여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성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잔을 받는 것이 누구에게 허용되어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 남자와 여자가 모두 참석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할례가 이스라엘의 씨의 거룩함을 입증하는 증표였기에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 역시 동등하게 거룩해야 한다. 남자들의 몸에 할례의 표증이 새겨진 것은 그것에만 본성을 통하여 그 표징이 새겨질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통하여 그들과 똑같이 할례의 동료이자 동반자였다(4권 16장 16절 적용).

이상을 종합하면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권 16장 8절 적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세례가 의미하는 비밀, 곧 영적인 중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갓난아이 때에는 그러한 중생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아이들을 두 번째 태어남에 적합할 때까지 세례를 베풀지 말고 아담(죽음)의 자녀로 그냥 두자고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짓은 아이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내쫓아내고서 죽음의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4권 16장 17절 적용).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내게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은 아담의 자녀로 죽음에 빠져 있는 그들을 자기 자신에게 아이들을 참여시켜서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에, 그분 외에는 생명의 소망이 없기에(고전 15:22), 어린아이들이나 우리나 생명의 상속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어머니의 모태 때부터 거룩하였다(눅 1:15).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이미 성령의 충만함도 받았다. 우리의 주, 그리스도께서도 갓난아이 때부터 거룩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유아기 때라 해서 성화가 없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4권 16장 18절). 그러므로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설교와의 별개의 방식인 성령의 조명으로 유아들에게도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으시다. 유아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유아들이 지금은 어리지만 얼마만 지나면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한 부여를 온전히 누리게 될 터인데 그들이 어릴 때에 그 은혜의 어떤 부분을 누린다고 해서 잘못될 것도 전혀 없다.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삶의 부요함이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에 있다면 유아로서 설령 유아기에 죽음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그의 현존하는 얼굴을 깊이 바라보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4권 16장 19절 적용). 그래서 유아세례는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의 성례인 할례를 통해서 유아들과 교통하셨다. 할례를 받을 때 유아들은 아직 자신들의 본성의 오염과 부패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죽이는 할례를 받았다(4권 16장 20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의 세례를 통해 비록 그들이 자신의 죄악을 알지 못하신다하더라도 유아들을 품에 안으신다. 그래서 유아세례는 베풀어져야 한다.

이외에도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할 두 가지 중대한 조건이 있다. 하나는 주님이 자기가 선택하신 자들이 중생의 표징을 받았으나 장성하기 전에 현세의 삶을 떠나게 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자기의 영의 능력으로써 무슨 방식으로든지 그들을 갱신시키시기 때문에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아들이 세례의 진리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갱신의 표를 주신 것이 그들의 전 생애에 걸쳐 갱신을 묵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갱신을 위한 열의를 더 크게 불타오르게 한다는 것이다(4권 16장 21절 적용).

사람의 본성의 상황에서는 유아세례는 필연적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사람은 타고난 죄인들이기에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사함과 은총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릴 때부터 자기의 자비에 대한 소망의 싹을 자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더욱 확실하게 새겨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교회가 물로 씻음을 받음으로써 깨끗하게 된 것(엡 5:26)도 같은 이유다. 그렇다면 교회의 한 부분이자 천국의 상속자로 부르심을 받은 어린아이들 역시 어려서부터 죄사함이 필요하다. 그들이 교회 안에 속해 있기에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님께서 자신의 지체들로 인정하시는 유아들이 그의 몸에서 찢겨 나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확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어떤 사람에게서 세례를 취한 재능이 제거되었다고 곧바로 그가 멸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해야 할 만큼 세례가 절대적이지는 않다(4권 16장 26절 적용). 주님이 30세가 되셔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도 유아들 중에도 얼마든지 세례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공표하라는 명령이었지 저 순서에 따라서 누군가가 먼저 믿거든 세례를 주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례는 가르침이라는 직분 안에 종속된다(4권 16장 29).

유아세례를 받은 유아들을 성찬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본래 성찬은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몸과 피를 분별하고 자기 자신의 양심을 살피며, 주님의 죽음을 선언하며, 그 능력을 깊이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 주셨다. 그러면서 “자기를 살피고 난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라고 하시고 또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직 분별하지 못하는 유아들을 성찬에 참여시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선배들로써 우리는 유아들을 성찬에 참여시켜 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세례의 기원과 시작이 복음의 선포에 있다(4권 16장 29절). 유아세례의 기원과 시작도 복음의 선포에 있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것은 사탄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 된다. 사탄은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즐거움의 열매를 앗아 가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영광을 그만큼 감소시키려 한다. 이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출생 이후 즉시 자기의 자녀들로서 취하시고 인정하신다는 생각을 명심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와 율법을 준수하게 하려는 강한 열망을 소유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있다.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날뛰고 있다. 교묘한 사악한 지식이 넘쳐나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사탄의 가족 안에서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 이에 따라 어린아이들이 사악한 언어와 말과 행동이 번지고 있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타락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환경의 급격한 변화 역시 어린아이들을 건강과 지식 등을 위협하고 있다. 이 사악한 세상에 맞서서 우리 신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굳게 하여 가능한 한 일찍이 우리의 자녀들과 이 땅의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유아세례의 경우는 바람직하지만 세례와 입교문답의 연령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세례나 입교를 초등학교 5학년 전후로 낮추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이 사탄의 세력 하에 더 오랫동안 종으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인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선배로서 그들을 사탄에게로부터 지켜내는 직분을 다해야 한다.

할례의 날짜는 정해져 있었지만 세례의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다. 할 수만 있다면 일찍 유아세례와 세례, 그리고 입교를 베푸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모든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유아세례와 세례를 베풀고 받기에 열심을 내야 할 때다.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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