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9) -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 유용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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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기독교강요 둘러보기(49) -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 유용성(2)
  • 승인 2023.09.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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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사목사(전 백석대교수ㆍ교육학박사, 본지 논설위원)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관련하여 “내 몸이니라” “내 피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좀 더 탐구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몸)이니라’ ‘(피)니라’는 환유(換喩, 다른 것으로 바꾸어 비유함)적 표현이다.

할례는 언약을 상징한다(창 17:13). 어린양은 유월절을 상징한다(출 12:11). 율법의 희생제물은 속죄(레 17:11, 히 9:22)를 상징하며, 광야에서 물이 흘러나왔던 바위는 그리스도(출 17:6, 고전 10:4)를 상징한다. 할례, 어린양, 희생제물, 광야의 물은 모두 그것들이 각각 상징하는 본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내 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양식이자 영생을, ‘내 피’는 그리스도의 영생의 음료이자 죄의 용서와 씻음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이라, 내 피라”고 말씀했을 때 ‘이것’은 눈에 보이는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다’(라틴어 est)는 너무 강한 말이기에 떡 이외에 다른 어떤 비유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4권 17장 22절 적용).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떡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곤경에 처한 제자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준비하신 그리스도가 모호한 말씀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을 리 없다고 하면서 떡이 그리스도임을 한사코 고집한다.

하지만 칼뱅은 ‘이다’가 얼마든지 다른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어린 양)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43),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등에서 사용되는 ‘이다’(est)는 각각 유월절과 그리스도를 비유 내지 환유한다는 것이다(4권 17장 22절).

만일에 하나님을 ‘용사’(출 15:3)라고 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에 불과하다. 이외에 성찬과 관련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시도하는 자체를 거짓말 하는 자로 정죄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들이 칼뱅주의자들의 화체설부정에 대하여 이성에 얽매여서 자연의 질서와 상식이 명하는 것 이상을 하나님의 권능에 돌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도 억지 논리다.

화체설 주장자들에 대한 칼뱅의 논박은 그들을 진정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교황주의자들은 먼저 평온한 마음과 온유한 영을 지니고서(약 1:21)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완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4권 17장 25절).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자기의 살로써, 피로써 먹이신다는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이성이나 자연과학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그리스도가 외적인 징표와 자기의 영으로써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며, 우리를 참되게 살리신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으셨기에 육체의 조건에 따라 하나의 확실한 장소에 존재하시고, 그 규모에 따라서 존재하시며, 그 양식으로 존재하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부패하지 않음과 영광이 계신다(4권 17장 24절 적용).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결단코 성찬의 떡으로 환유될 수 없으시다.

성경이 증언하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그때로부터 유한했으며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받아들여져 있다(행 3:21). 그리스도께서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그가 …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라고 말씀하신 그대로다. 그는 지금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다(막 16:19). 동시에 그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하신 말씀 그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떡으로 변하시거나 떡의 외양 등에 현전할 필요가 전혀 없으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방식, 곧 엄위와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다(4권 17장 26절). 그리스도의 엄위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섭리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또한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써 우리와 함께 계신다. 칼뱅은 특히 이 형언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놀랍게 교제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한정되셨음에도 지금 하늘에 계시며 여전히 여기에도 계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하늘에 올라가심에 대하여 그것이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통치권의 엄위(the majesty of his rule)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발악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땅을 떠나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땅에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다가 때가 되면 보이는 분으로 오시게 된다는 것이다(4권 17장 27절 적용).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박은 통렬하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육체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으나 그것으로부터 그 본성을 제거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이 한 인격이시며 이 둘이 한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통하여서 그는 모든 곳에 계신다. 그가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통하여서는 그는 하늘에 계신다(4권 17장 28절). 그렇다. 지금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에 계신다(행 1:9). 그가 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경건한 모든 자를 그곳으로 모으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다고 선포하면서 그곳으로부터 오실 그를 기다리라고 명령한(빌 3:20)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외에도 교황주의자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의 가면에 가려져 있지 않는 한 주어질 수 없다고도 고집을 피운다. 특히 세르베투스는 그의 몸이 그의 신성에 흡수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그 자체로 보이는 것으로 존재하지만, 성찬에서는 특별한 방식의 경륜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4권 17장 29절). 즉, 그는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가 떡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해야만 (교황주의자들의) 성축의 의의와 권위가 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단언컨대 그리스도는 몸을 지니시고 계시며 가시적이시다. 누가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보고 … 만져보라 …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눅 24:39)라고 증언하였다. 바울사도는 “우리는 … 하늘로부터 … 구원하는 자를 기다리노니 …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형체가 있는 몸을 가지신 것이다. 이 때문에 칼뱅은 부활 후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 했을 때 금하신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하늘에서 찾게 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본 것과 관련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종들에게 하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셔서 자신을 보겠다고 장소를 옮길 필요가 없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4권 17장 29절).

이제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교통하심을 살펴볼 차례다. 교황주의자들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교통하는 것으로 여긴다. 심각한 오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심은 항구적이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두 성의 연합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한다. 즉 성찬 시에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의 본체로써는 그리스도의 영생하는 몸과 죄 씻음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그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이를 오해하여 유티케스와 세베르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본성들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모든 곳에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의 육체가 있다고 헛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떡과 포도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화체되신 그리스도가 계셔야만 되게 되었다. 이 주장을 정당화할 양으로 유티케스는 두 본성 사이의 구별을 제거한 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인격의 하나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만들어 내고,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만들어 내어야했다(4권 17장 30절 적용).

성찬 시에 신자들이 먹는 떡과 마시는 포도주가 그 효능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가. 이것들은 겨우 하루 정도나 우리의 몸 안에 남아있을까 말까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그 자체는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신자는 성례적으로 먹는 것과 본체로써 먹는 것 사이의 대조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4권 17장 34절).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이 그 해답을 제공한다. “당신의 목구멍을 준비하지 말고 마음을 준비하라. 이것이 성찬에서 위탁되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받을 때 그를 믿는다. … 우리가 적은 양을 받으나 마음이 기름지게 된다. 우리를 먹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4권 17장 34절).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8),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 1:18). 그리스도 전체(신성과 인성)가 모든 곳에 계시기에 우리의 중보자는 항상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함께 현존하시고, 성찬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자기를 제시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전체가 현존하시지만 전부가 현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위하여 나타나실 때까지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4권 17장 32절 적용).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현존이 떡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떡으로, 또는 떡 안에, 또는 떡의 외형으로 계셔야만 성찬의 참 의미가 있는 듯이 여겨질 수가 없다. 신자는 떡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성찬의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교통 곧 그의 현전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경험, 곧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하여 현존하는 경험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칼뱅은 자신의 성찬에 대한 경험으로 영혼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음료인 그의 피를 받아 먹고 마시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드렸다고 고백하였다(4권 17장 32절 적용). 그의 성찬에의 참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가 천국의 영광에로 받아들여지셨다는 신성과 참 인성에 고유한 것들을 결코 모자람 없이 구유하고 계신다는 확신(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성례는 사람들을 통해서이지만 신적인 것이며,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천상적이다. 그리고 성찬의 논리는 반드시 몸의 현전을 요구한다(4권 17장 32절 적용, 688). 따라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각각 표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참여를 통해 우리의 영혼에 대한 영생을 확신하며 우리의 육체의 불멸성에 대해 평정의 마음을 갖게 되어야 한다. 이 영생과 불멸의 교통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현전이 있다. 그리고 이 교통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4권 17장 33절). 즉,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제물 되심으로 우리가 죄를 속함 받고,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 우리가 천상의 삶의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신자가 성례를 통해서 경배하는 분은 하늘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다(4권 17장 37절).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이것이 성례의 첫 번째 유용성(또는 목적)이다. 그리고 성례를 통하여 “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다(고전 11:26). 즉, 신자는 우리의 생명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오직 주님의 죽음에 자리하고 있음을 한 입으로 공적으로 고백하는 한편, 이 고백을 통하여 주심을 영화롭게 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해야 한다. 이것이 성례의 두 번째 유용함이다. 성례의 세 번째 유용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을 자주 ‘사랑의 고리’라고 불렀다(4권 17장 38절).

성찬에는 또한 말씀이 따라야 한다. 말(설교)없이 하는 성찬은 터무니(근거가)없다. 떡과 잔과 더불어 약속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약속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자들을 세우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며, 그들의 마음에 각인되고 정착되며,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성취함에 있어서의 그것의 효과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설교다(4권 17장 39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고전 11:28)셔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27, 29).

성찬(례)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의 정서를 깨우고, 일으키고, 자극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제정되었다(4권 17장 42절). 그러므로 신자는 성례의 참여에 있어 온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의 사랑에 의지하여야 한다.

성찬의 횟수와 관련해서는 칼뱅은 교회의 자유로운 처사에 맡겼다. 하지만 성찬을 자주 거행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성찬을 거행할 것을 권했다. 바울이 받은 말씀은 모든 사람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찬은 가능한 한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여 자주 거행하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죄를 죽이고 영생을 확신하며 평안해 하는 영적 교통의 성례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신자들의 가정 안에서의 잦은 성찬도 고려해 볼만 하다. 성찬이 형식적 성례인 반면에 신자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든지 그때마다 참으로 주를 기억하며 그를 경배한다면 그 의례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성례(찬)이 된다. 그때마다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현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대한의 신자들이여!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현전의 교통을 통해 영생과 구원을 확신하며,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와 서로가 하나가 되어 평안을 누리며 살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문노사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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